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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진 Feb 13. 2021

본 투 비 프로페셔널 (上)

엄마에게 아들이 생겼다.

배로 낳은 것은 나와 여동생 이렇게 두 딸이고, 새로 생긴 것은 스물여섯 살짜리 영국인 아들이다.

그 사연은 이랬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다. 내 동생은 연애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애였다. 공부에도 딱히 흥미는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려서 집과 가까운 광주의 어느 미대에 진학했다. 아직 꿈은 결정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부터 스카이프를 통한 언어 교환 프로그램에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온라인에서 여러 외국 친구들을 만나 채팅을 하기 시작했고, 각종 미드도 챙겨보았다. 영어는 어느새 쏼라쏼라의 경지에 다다랐다. 그러다 한 아이와 유독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영국에 사는 애였고, 동생에게 직접 만든 엽서나 소포를 종종 보내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동생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언니, 나 남자 친구 생겼어."

"뭐라고? 누구? 어떤 사람이야!"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희미하지만, 대략 흥분한 말투)

"지금은 영국에 있고, 직접 만난 적은 없어."

"뭐라고??? 그럼 어떤 애인 줄 알고 남자 친구라고 하는 거야???" (2차 쇼크 후. 호통 조인 것이 포인트)

"그리고 이번 12월에..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어. 아직 엄마 아빠는 몰라."

"..." (3차 쇼크)


뭐랄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런 언니였다.

서울로 올라와 혼자 생활하며 겪는 온갖 시행착오를 나에게는 모두 용인하면서, 동생이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진 언니. 동생은 모든 것을 나에게 의지했으며(그렇다고 생각했으며), 작은 일 하나도 방법을 직접 찾아보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심지어 서울에 혼자 올라오는 것도 못해서 나는 고속터미널의 버스 개찰구 앞에서 딱 동생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인지 그런 순간들이 억울했다. 나도 모든 것에 서투른 때가 있었는데, 그런 시절은 홀랑 까먹어버리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언니였다. 아무튼 그런 내가 동생의 첫 연애와 영국행 비행기 티켓 이야기를 들었으니 발을 동동구를 수밖에. 


한 번도 타국으로 떠나본 적 없던 동생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과감한 결정 하나를 내린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는 '이왕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 다녀올 수밖에 없지 않겠니'(다시 생각해봐도 믿을 수 없는 쿨함)라는 반응이었으며, 이윽고 동생이 영국으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동생과, 함께 올라온 엄마를 만났다. 때는 12월 중순이었고, 동생은 영국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도 보내고 보름 넘게 머물다 올 예정이었다.


엄마와 나는 동생이 공항 직원에게 여권을 보여주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한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의 눈동자는 강물처럼 글썽거렸고, 그 장면은 누가 봐도 오랜 기간 유학을 보내는 딸과의 이별 장면 같았다. 우리 둘은 한참을 그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비행기는 잘 찾아서 타려나 몰라. 못 탈 수도 있으니까 한 시간 정도쯤은 여기서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눈물을 훔치며 엄마가 말했다.


동생은 영국의 공항에 잘 도착했다. 무려 유심 카드 구매에도 성공해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했으며, 공항에서 두 시간은 굽이굽이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남자 친구의 동네까지 무사히 당도했다. 남자 친구의 이름은 아론. 동생은 아론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아론의 집 옆에는 숲도 있고 바다도 가까웠다. 그의 집에서, 그의 부모님과 누나, 누나의 남편, 그들의 어린 두 아들과도 함께 보름을 보냈다.


이듬해 동생이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서울에 있고 동생은 광주에 있었으며, 설 연휴가 되어 고향에서 동생을 만났다. 보름 간의 길고도 짧은 만남은 끝이 났지만, 동생과 아론의 관계는 진행 중이었다.

"언니, 나 아론이랑 같이 영화 보려고. 오늘은 '월-E'를 보기로 했어."

"같이 영화를 본다고?" (어리둥절)

"이렇게. 하나, 둘, 셋!" (스카이프 화면 속의 아론과 동시에 영화 '월-E'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아...'

시차 8시간의 영국과 광주에서, 둘은 같은 영화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동생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할 때 아론은 모니터의 스카이프 화면 속에 곤히 잠들어 있었으며, 동생도 일과를 마치고 잠에 들기 전 머리맡에 스카이프 화면을 띄운 노트북을 두고 잠을 청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아론이 한국으로 왔다. 정확히는 한국의 '익산'에.

그는 익산의 어느 영어학원에 취직을 했다. 서울도 생각을 해봤지만 너무 복잡했고 무엇보다 광주에 있는 동생과 자주 만나기엔 먼 지역이었다. 광주와 가깝고도 조용한 도시를 찾다가 익산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아론이 익산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익산이 대체 어디야? 라며 유심히 그 지역을 살펴보게 되었다.


아론이 익산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석이 됐다. 나는 그 연휴에 아론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잔뜩 모여있는 까만 머리와 흰머리 사이, 황금빛을 띠는 주황색 머리가 함께 앉아있던 그 거실 풍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론은 그때부터 속성으로 한국 문화를 익히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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