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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 J Feb 03. 2018

뮤즈와 함께 춤을

피카소 여인들_2

피카소는 평생 동안 많은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받아 현대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피카소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다. 그를 좋게 말하면 사랑의 힘으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줄 여자가 필요했던 부도덕한 카사노바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여자를 이용했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만났던 여자들에게 진심이었을 수 있겠지만 금방 싫증을 내고 새로운 뮤즈를 찾았다. (피카소가 여자들을 진심으로 만났는지 아닌지는 본인 외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피카소는 세 번째 여자인 올가와 결혼해 자식도 있었지만 이미 그의 여성편력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1927년 그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 테레즈 윌터'를 만나게 된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마리의 나이 17세였다. (마리의 나이에 대해서 16세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한 나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피카소는 마리에게 자신의 모델로써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계속되는 제안에 그녀는 거절했지만, 결국 집요하게 들이댔던 피카소의 꼬임에 넘어간다. 피카소는 한참 어린 나이의 여자와 교제를 한다.

Portrait Of Marie-Thérèse Walter With Garland (1937)
Marie-Therese Walter (1927)

이 시기 피카소의 화풍은 청색시대, 장밋빛시대, 입체주의 그리고 고전주의를 거쳐 바로 이 시기에 '야만시대'에 다다른다. 야만시대의 작품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던 전통적인 관습을 탈피하고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 모습이 매우 괴기하여 '괴물 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시기 그림을 보면 피카소의 작품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상 깊다. 이 시기에 피카소가 그린 여자들의 모습은 모두 눈코입이 뒤틀려있다. 특징적인 것을 더욱 부각해서 환각에 빠진 것 같이 보이는 아주 초현실적인 그림이다.

Three musicians (1921)
El beso (1925)
Bust of woman portrait (1929)

마리는 피카소가 만난 여자 중 최고의 뮤즈였다. 피카소는 그녀를 통해 수많은 명작을 낳았고, 그중 마리를 그린 그림들이 가장 낭만적이다. 이 시기에 그린 수많은 작품 중에 마리를 모델로 한 <꿈>이라는 그림이 잘 알려져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에 속했었다. 마리를 만나며 화풍이 한번 더 바뀌는데 이 시기를 피카소의 '부아젤루시대'라 한다.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부아젤루성을 사서 화실을 마련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해서 부아젤루 시대라 부른다. 피카소는 새로운 화실에서 여러 가지 기법을 가지고 시험적인 작품에 몰두했고 마리를 모델로 조각을 했다.

The dream (1932) 

마리는 아버지 뻘 되는 피카소를 만나 딸'마야'를 낳는다. 그리고 매몰차게 버림을 받는다. 피카소는 이미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간 상태였다. 마리는 인생의 전부를 피카소에게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나쁜 남자를 만난 마리는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었다. 피카소와 헤어진 후에도 그의 여자로 남는다. 버림을 받고 홀대를 받았음도 피카소가 없으면 인생이 의미가 없다는 듯 훗날 피카소가 죽자 마리는 자살을 한다. 

Nude, Green Leaves and Bust (1932)

쉴 새 없는 피카소의 여성편력은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다섯 번째 여인 '도라 마르'라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진다. 이 당시 피카소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게르니카>라는 벽화의 형상을 띈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1937년 4월 26일 독일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하였을 당시 처참한 상황을 것을 표현한 그림이다. '게르니카'사건에 대한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무채색을 썼다. 흑백의 무채색만 강조되었을 뿐 폭격기나 폭탄은 없었지만 그림은 충분히 그 당시의 고통과 참혹함을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이 시대를 피카소의 '전쟁시대'라고 한다. 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 게르니카에 독일군 폭격기들이 대대 적인 공습을 가한 사건으로 가옥의 80%가 파괴되고,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특별히 선발한 콘도르 군단의 폭격기 24대가 게르니카 상공에 나타났다. 외부로 이어진 다리와 길을 모두 파괴한 후 그들은 민간인이 사는 마을 한복판에 최신형 고성능 폭탄을 쏟아부었다. 이날 게르니카에 투하된 폭탄의 양은 24톤 희생자 2500명 이상의 사상자는 대부분 힘없는 노인과 여성들이었다.


El Guernica (1937)

Guernica (1937)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작업하면서 작품의 과정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한 사진작가 '도라 마르'와 가까워진다.  <게르니카>를 완성하는 데 그녀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도라 마르를 만났을 때 피카소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 당시 피카소의 나이 54세였고, 도라 마르의 나이는 27~29세였다. (여전히 나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피카소는 마리를 만나고 있는 중에 도라 마르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피카소는 '프랑스와즈 질로'라는 또 다른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피카소의 여성편력에 질투를 느낀 도라 마르는 피카소를 볼 때마다 분노와 슬픔에 잠겨 울었다. 피카소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기도 했다. 피카소가 그린 작품 속 도라 마르는 대부분 슬픈 표정을 짓거나 우는 모습이다. 이때 <우는 여인>이라는 피카소의 대표작이 하나 탄생한다. 8년의 연애 끝에 둘의 관계는 정리되었고 도라 마르는 1997년 89살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도 마리 테레즈 못지않게 피카소에게 많은 영감을 준 여자 중 한 명이었다.

Weeping Woman (1937)
프랑스와즈 초상 (1946)

도라 마르를 질투에 미치도록 한 여자 '프랑스와즈 질로' 그녀는 피카소의 여섯 번째 여인이다. 당시 62세였던 피카소는 22세의 미술작가 프랑스와즈의 전시회에 참석을 하면서 그녀를 알게 된다.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결국 그녀는 피카소의 꼬임에 넘어오게 되어 동거를 시작한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의 아들 '클로드'와 딸'팔로마'를 낳는다. 그녀는 피카소의 다른 여인들과 달리 피카소에게서 자유로웠다. 다른 여인들은 피카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녀는 피카소를 떠나 독립한 유일한 여자이다. 그녀는 피카소와 헤어지고 다른 남성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미술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책을 발간하며 작가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녀는 피카소의 여인으로 살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많은 미술작품을 남겼다. 피카소는 프랑스와즈를 모델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클로드와 팔로마를 모델로 한 작품도 남겼다. 훗날 프랑스와즈는 이 두 자녀를 피카소의 호적에 올려 어마어마한 상속을 받게 한다.


Mere Children has L'orange, (1951)
피카소와 프랑스와즈 해변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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