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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mpado Mar 24. 2022

한 장의 소설_질문은 멈추질 않고

   글이 멀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이 아니라 글자가 멀어진다. 눈이 초점을 맞추지 않아서다. 눈이 초점을 두지 않는다. 똑똑히 모니터를 보고 글을 써도 모자 판에 흐릿한 글자들을 가운데에  책상 위의 사방이 시야에 있다. 모니터의  편에는 시디들 스티커 친구가 주워다  조개껍질 열린 필통 제자리를 벗어난 볼펜들 깨진 화병과 수첩이 있다. 오른 편에는  읽은  읽다 말은  읽고 싶은  읽어야 하는 책들이 쌓여있고 핸드크림과 찢어진 드립백 봉투 물티슈 이어폰이 있다. 똑바로 보지 않아도 앞서 말한 물체들이 ‘보인다 범위에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인체의 신비란 이런 걸까. 그러나 나는 인체의 신비 같은 것엔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알고 싶은   눈이 응시하는 곳이다. 무엇을 보려고 돌연 자신의 일을 하려들지 않는 건지 눈에게 묻는다. 나의 물음표는 이곳에 있다.  


    누가  멍을  때리는지 대결하는 대회도 있다는데 거기에 참가하면 우승할  있을까 상상해 본다.  유명 가수는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다.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서는  때리기 대회에도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에 남아있다.  기준이 무엇인지도 말을 했던  같은데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대회 기간을 찾아보다가  귀찮아졌다. 참가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지만 나간다고 해서 내가 어떤 상을 받아올  같지 . 멍을 때리려면 눈과 머리가 동시에  짓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은 시시각각 과도하게 움직인다. 불균형은 어디에 붙여 놔도 좋은 말이 아니다. 삶의 불균형, 힘의 불균형, 관계의 불균형, 식단의 불균형   듣기 좋은 소리는 하나도 없다. 불균형은 누구를 만나든 골칫거리가 된다. 갑자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단어는 사랑으로 태어나서 사랑 받고 어떤 단어는 희생이나 용서로 태어나서 추앙 받고 칭찬 받는데 불균형의 역할은 골칫거리라니.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더니  말이  맞다. 인간뿐만 아니라 단어조차도 다른 무게를 진다. 이것에 대해 심도 있게 말하고 싶지만 그럴 재간은 없다. 그만큼의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 나의 눈과 머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찾아 나서야겠다.


   생각이 너무 많다,   번째 후보다. 스마트폰과 모니터 앞에 주구장창 붙어 있는 것도 후보로 올릴  있겠다. 눈이 피로해서 스스로 쉬는 시간을 갖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잠을 쪼개서 자는 것도 이유일  있고 이유가 없다는 것도 후보가   있다. 여기서 가능성이 제일 적은 것들부터 제하고 나면 남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니면 눈이 너무 지쳐서다. 이런  어디에 가서 진단을 받아야 하나. 안과를 가도 신경과를 가도 답은   없을  같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진단을 받으면 표면적인 이유야 알게  것이다. 그들은 수치를 확인하고 거기서 얻은 확신을 말해줄 테니까. 하지만  눈이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진짜 이유란 영원히   없는 일이다. 애초에 틀린 곳을 찾아 나서면 이렇게 고생을 한다. 시간이 촉박한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낭비한  아닌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어 본다.   있다고 여기던 것들이 부지기수로   없는 것들로 밝혀진다.   있다와   없다는 전혀 다른 맥락인데 어떻게   있다가   없다,  귀결되는 걸까. 이건  다른 쓸데없는 생각의 시작일까. 쓸데없는 생각과 쓸데 있는 생각의 구분은 어떻게 나누는 걸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분명 아무 것도 하지 는데 시간은  아침의 숫자가 된다. 친구는 도대체 밤에  하길래  시간에 자냐고 묻는다. 나는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바쁠  있는지 설명하려다 그만 둔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확신할  있는, 친구의 시간을 쓸데없는 곳에 쓰는 일이  테니까. 그런  혼자 해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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