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이정아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기담집》 이후 9년 만에 펴낸 단편집으로 일본 출간 당시 예약판매로만 3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화제의 책이다. 그간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해 왔던 저자가 2013년 말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발표한 다섯 편의 단편과 단행본 출간에 맞춰 새로 쓴 표제작 ‘여자 없는 남자들’, 저자가 직접 선별한 영미권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워서》에 수록된 ‘사랑하는 잠자’까지 만나볼 수 있다.
소설은 아주 흡족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그의 소설다운 소설이었다. 1Q84 같은 장편소설에서 볼 수 있는 환상적인 면과 하루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적절하고도 조화롭게 썼다. 단편의 잔잔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암으로 죽어버린 아내를 추억하는 일을, 무뚝뚝한 여자 운전사 미사키의 침묵이 편하게 느껴졌는지 배우인 가후쿠가 죽은 아내를 추억하는 이야기 인「드라이브 마이카」. 아내와 잠을 잤던 동료배우 다카스키와 아내 이야기를 하며 친구가 되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그렸다.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늘 개사해서 부르곤 했던 기타루와의 이야기를 다룬 「예스터데이」. 다니무라는 찻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기타루를 알게 되었다. 기타루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귄 여자친구 에리카가 있다. 기타루는 삼수생, 에리카는 대학생, 다른 이와 에리카가 사귀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기타루는 자신의 친구에게 자기의 연인과 사귀어보는 것을 권한다. 그 편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다니무라는 에리카와 만나 영화를 보고 만남을 갖게 되는 데...
「독립기관」은 「예스터데이」와 같은 다니무라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다. 「예스터데이」에서 다니무라도 소설을 쓰고 싶어 했고, 「독립기관」에서의 다니무라도 글을 쓰는 작가이다. 다니무라는 성형외과 의사인 도카이의 이야기를 한다. 애인이 있는 여자와 남편 있는 여자와만 연애를 하던 그였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싫어하던 그가 사랑에 빠져 버렸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데 나중엔 믿었던 그녀에게서 배반을 당한다.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독립기관'이 있다나. 그것이 거짓말인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독립기관이 알아서 거짓말을 하게 된다나? 다니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닐까.
『천일야화』의 왕비 셰에라자드처럼 하바라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흥미롭고 신비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는 여자를 그는 「셰에라자드」라 불렀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이야기를 끊고 가버렸던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하바라는 기다리곤 했다. 자신의 전생이 칠성장어였다는 소릴 하고 나서는 고등학교 때 학교를 빠지고 빈집털이를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좋아하던 남학생의 집에서 남학생이 쓰던 연필을 하나씩 들고 나오며, 열병처럼 남학생의 집을 몇 번 털었지만 어느 순간에 식어버렸던 이야기.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인다는.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어 이혼을 하고, 홀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기노」가 겪는 기이한 경험들을 적었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했지만, 갑자기 여자가 죽거나 사라져 버리면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는 이야기. 누구라고 이름을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열네 살의 같은 반의 여자아이였던, '엠'이라고 칭해보는 여자를 추억한다. 마치 꿈속의 여자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될 마음들을 담았다. 여자를 잃고 난 남자들의 심정, 지우개 반쪽을 오래도록 간직했던 것처럼 그 여자 '엠'에 대한 회상을 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오마주인 「사랑하는 잠자」는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하는 잠자」를 제외하고 하루키의 여섯 편의 단편은 모두 중년의 나이인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사랑, 그 속에 홀로 남은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내게로 오는 사람을 막기도 하고, 상대방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을 걷잡을 수 없지만, 어느 순간에 마치 차가운 얼음처럼 식어버리고 만다.
홀로 사는 중년 남자들이 느끼는 외로움, 고독들의 내음이 짙게 배어있었던 소설이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제목과 같이 여자 없는 남자들을 모티프로 삼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자를 떠나보낸 남자들, 혹은 떠나보내려 하는 남자들을 이야기한다. 연인이나 아내로서의 여성성이 부재하거나 상실이 된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남녀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깊은 지점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2014에 쓴 독후감
저자소개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 교토에서 태어났고, 1968년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하여 전공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1982년 첫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노마문예신인상을, 1985년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 발표한 '상실의 시대'는 일본에서만 약 430만 부가 팔려 하루키 신드롬을 낳았다. 그 외에도 '태엽 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 '어둠의 저편', '렉싱턴의 유령', '도쿄 기담집', '먼 북소리', '슬픈 외국어' 등 많은 소설과 에세이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외국문학에 대해 배타적인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한 세계 40여 개 나라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5년 '뉴욕타임스'는 아시아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해변의 카프카'를 '올해의 책'에 선정했다. 또 2006년에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해럴드 핀터 등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받은 체코의 '프란츠 카프카상'을, 2009년에는 이스라엘 최고의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