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영화 <벼랑 끝에 서서>(원제: Straw)는 공개 첫 주, 넷플릭스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동시에 평론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면치 못했죠. 관객과 평단의 이러한 극명한 평가 차이는 이 영화가 지닌 문화적 기능의 핵심 단서를 제공합니다.
영화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투잡을 뛰는 흑인 여성 자니야(타라지 P. 헨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연이어 닥치는 불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며 ‘최악의 하루’를 보냅니다.
영화의 멜로드라마적 과잉, 노골적인 메시지 전달, 조악해 보이는 프로덕션 등 영화적 결함으로 지적되는 요소들은 오히려 이 영화가 지닌 사회적, 정서적 힘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영화라기보다는, 체계적 억압과 개인의 인간 존엄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무대에 올리는 ‘날것 그대로의 우화적 시련’에 가깝습니다.
‘페리 스타일’의 어법
타일러 페리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 톤’으로 정의되며, 고양된 감정과 사회적 논평을 혼합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연극 무대와 미국 남부 침례교회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세련미보다는 ‘과장과 행위’를 중시하죠.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종종 ‘어색한 배우 동선, 칙칙한 조명, 거슬리는 편집’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습니다.
<벼랑 끝에 서서>의 ‘조악하게 만들어진 듯한’ 프로덕션은 단 4일이라는 극도로 짧은 제작 기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제작 환경은 낮에서 밤으로 급작스럽게 전환되거나, 주변 조명과 어울리지 않는 폭우 장면 등 시각적, 서사적 비일관성을 낳았고, 이는 영화의 리얼리즘을 해친다는 비판으로 이어졌죠.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을 ‘시네마틱 블랙 캠프(cinematic Black camp)’라는 렌즈로 바라볼 때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과장된 드라마’, ‘지나치게 노골적인’ 주제, 전형적인 플롯 전개는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전통적인 영화적 완성도보다 정서적 충격과 오락성을 우선시하는 의도적이고 양식화된 행위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본능적인 감정’은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결점들을 가려버릴 정도이며, 이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일정 부분 성공했음을 시사합니다.
이 지점에서 평단과 관객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는 단순한 질적 평가의 차이를 넘어, 영화를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평가 방식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평론가들은 강요된 듯한 플롯, 엉성한 속도 조절, 저렴한 프로덕션 등 영화적 완성도의 기준에서 작품을 바라봅니다. 이는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지적입니다. 반면, 관객들, 특히 흑인 여성들은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싱글맘으로 세 아들을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나서 울었다”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영화의 정서적 진실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들의 평가는 ‘보여지고 이해받는다’는 감각에서 비롯됩니다.
타일러 페리 자신도 주류 미디어에서 소외된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공언해 왔습니다. 그는 “흑인들의 언어로 말하는 영화”를 통해 특정 커뮤니티에 “영화적 해방감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관객에게 성공한 것은 영화적 ‘결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결함’ 덕분입니다. 멜로드라마와 노골적인 대사야말로 “가슴을 후벼 파는 현실성”과 “날것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핵심 도구로 작용하는 것이죠.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노리는 예술 영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던 공동체를 위해 깊고 공유된 인식을 창출하려는 문화적 증언과 기록에 가깝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예술성이 아닌,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에 대한 진정성을 내세운 작품입니다.
타라지 P. 헨슨의 압도적 연기
타라지 P. 헨슨의 연기는 평론가와 관객 모두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은 유일한 요소입니다. 그녀는 각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토로하는 클라이맥스의 독백 장면, 체계적 무관심에 대한 처절한 반응, 그리고 폭우 속에서 절규하는 논쟁적인 장면 등에서 그녀의 연기는 엄청난 설득력과 폭발력을 갖습니다.
헨슨은 다른 프로젝트를 촬영하던 중 단 4일 만에 이 영화의 촬영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지독하게 두렵게 만드는” 캐릭터에 끌리며, “목소리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그녀의 연기가 단순한 해석을 넘어, 그녀가 속한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일종의 옹호 행위임을 시사합니다. 그녀는 순수한 의지와 공감의 힘으로 이 영화에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심장을 제공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마음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인 반전을 제시합니다.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의 반전이 “끔찍한 아이디어”이자 “값싼 결론”이라고 비판했죠. 이 반전이 영화의 사회적 논평을 약화시키고, “미친 여자”라는 진부한 틀로 이야기를 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체계적 억압의 문제를 개인의 심리적 트라우마로 환원함으로써 영화의 정치적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전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다소 서투르게 실행되었을지는 몰라도 이 반전은 영화 주제의 궁극적인 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신적 붕괴는 체계적 압박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그것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아무런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가 더해졌을 때, 마침내 그녀의 현실이 산산조각 난 것이죠. 영화의 제목 ‘Straw’처럼 딸의 죽음이야말로 그녀의 정신뿐만 아니라 온전한 정신 상태마저 무너뜨린 ‘마지막 지푸라기(the last straw)’였던 셈입니다.
이 반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과 인식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게 만듭니다. 소외된 이들에게 ‘최악의 하루’와 완전한 정신병적 발작 사이의 경계선이 얼마나 위험할 정도로 얇은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비평가를 의심하라
<벼랑 끝에 서서>에 대한 평단의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혹평과 관객의 폭발적인 지지 사이의 극명한 단절은, 단순히 영화적 취향의 차이를 넘어섭니다. 이는 영화 비평이라는 행위 자체가 지닌 사회적, 인종적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례입니다.이 영화에 가해진 비평의 잣대가 과연 보편타당한 ‘미학적 기준’인지, 아니면 특정 계층의 ‘지배적 시선’이 투영된 편향된 잣대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비평계는 통계적으로 압도적인 백인 남성 중심의 영역입니다. 2017년 USC 애넌버그 포용 이니셔티브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100대 흥행 영화에 대한 리뷰의 77.8%를 남성 비평가가, 82%를 백인 비평가가 작성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유색인종 여성 비평가가 작성한 ‘톱 크리틱(Top Critic)’ 리뷰는 단 2.5%에 불과하며, 백인 남성 비평가가 작성한 ‘톱 크리틱’은 유색인종 여성 톱 크리틱보다 거의 27배나 많습니다.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불균형은 심각한 결과를 낳습니다. 비평은 단순히 영화의 좋고 나쁨을 판별하는 객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비평은 문화적 자본을 분배하고, 어떤 이야기가 ‘중요하고, 가치 있으며, 예술적인지’를 규정하는 권력의 장입니다.
백인 남성 중심의 비평계는 필연적으로 백인 중산층의 경험과 가치관을 ‘보편적인 것’, 즉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적 맥락이나 미학적 형식, 예를 들어 흑인 교회 예배의 연극성이나 남부 흑인 커뮤니티의 언어 습관 등은 ‘세련되지 못하고, 조악하며, 과장된 것’으로 쉽게 평가절하될 수 있죠.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가 ‘남성적 시선’을 개념화한 것처럼 학자들은 영화계에 깊숙이 내재된 ‘백인의 시선’을 지적해 왔습니다. ‘백인의 시선’은 백인이 아닌 인물과 문화를 백인 관객이 이해하고 소비하기 편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백인의 관점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비평의 영역에서 이는 곧 ‘좋은 영화’의 불문율을 형성합니다.
‘백인의 관점’으로 말하는 ‘좋은 영화’의 규범
- 절제된 감정: 미묘하고 암시적인 감정 표현을 높이 평가하고, 직접적이고 격렬한 감정 표출은 ‘멜로드라마’ 또는 ‘신파’로 폄하합니다.
- 미학적 거리: 관객이 지적으로 거리를 두고 분석할 수 있는 작품을 ‘고급 예술’로 간주하고, 관객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고 몰입시키는 작품은 ‘저급하다’고 평가합니다.
<벼랑 끝에 서서>는 이 모든 ‘좋은 영화’의 규범을 정면으로 위반합니다. 페리 감독의 영화는 눈물을 짜내고, 소리치게 만들며, 노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죠. 이는 ‘고상한 예술’을 감상할 여유와 심리적 거리를 가진 계층의 시선에서는 당연히 ‘촌스럽고, 조악하며, 강요하는’ 영화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비평은 오만한 태도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문화적 기준 외에 다른 평가 척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흑인 페미니스트 사상가 벨 훅스는 이러한 지배적 시선에 맞서는 ‘저항적 시선’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미디어가 자신을 재현하는 방식에 비판적으로 저항하고, 자신들만의 의미를 창조하며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벼랑 끝에 서서>의 흑인 여성 관객들이 보인 열광적인 반응은 바로 이 ‘저항적 시선’의 구현이죠. 그들에게 영화의 ‘결함’으로 지적된 요소들은 오히려 가장 강력한 ‘미덕’이 됩니다.
- 과장된 연기는 진정성의 표출이다: 타라지 P. 헨슨의 절규는 ‘과잉 연기’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를 체화한 진실된 외침입니다.
- 조악한 연출은 날것의 현실감의 발로이다: 세련되지 않은 화면은 필터링되지 않은 삶의 고단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가 됩니다.
- 직설적인 메시지는 곧 인정과 위로다: “결국 우리에겐 사람이 필요하다”는 명확한 메시지는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는 대신, 지친 관객에게 직접적인 위로와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이 관객들은 영화를 예술 작품으로 ‘분석’ 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반영’되는 것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습니다. 그들에게 최고의 영화적 가치는 ‘보여지고 이해받는다’는 감각이며, <벼랑 끝에 서서>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스파이크 리 감독이 페리의 작품을 “쿤(coon,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 용어)과 버푸너리(buffoonery, 익살)”라고 비판했을 때, 그는 흑인이 백인의 시선 앞에서 어떻게 ‘품위 있게’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오랜 논쟁에 불을 지폈습니다. 반면 페리는 “나는 백인 비평가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나는 내 관객들을 위해 만든다”라고 응수하며, 이러한 지배적 시선 자체를 거부했죠.
결론적으로, <벼랑 끝에 서서>에 대한 평단의 혹평은 영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비평계의 구조적 편향성과 미학적 기준의 협소함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이 영화를 ‘못 만든 영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백인/중산층의 시선을 보편적 기준으로 착각하고, 그 외의 미학적 전통과 소통 방식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적 게으름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진정한 비평은, 영화를 평가하는 ‘나’의 시선이 과연 어디에 서 있는지를 먼저 성찰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타일러 페리의 역설은 계속된다
<벼랑 끝에 서서>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영화로 귀결됩니다.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로 포장된 ‘자본주의적 공포’이며, 영화적으로는 결함이 있지만 사회 비판과 철학적 탐구를 위한 강력한 매개체로 기능합니다. 서사적 과잉은 흑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현실적이고도 과도한 부담을 반영하고, 날것의 감정은 주 타깃 관객에게 깊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타일러 페리만의 역설’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니,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는 흑인 배우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고 소외된 공동체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지만, 동시에 ‘흑인에 대한 해로운 고정관념’과 ‘트라우마 포르노’를 영속화한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고 있죠. <벼랑 끝에 서서>는 흑인 여성의 고통을 착취하는 동시에 그 경험을 입증하는 역설의 정점에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가치는 다양한 분석을 촉발하는 능력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날것 그대로이고, 논쟁적이며, 타협하지 않는 모습으로 <벼랑 끝에 서서>는 예술, 상업, 인종, 계급, 그리고 그것을 파괴하려는 세상 속에서 인간적 연결의 가능성에 대한 필수적이고 불편한 대화를 끌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