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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래빗>: <오자크>에 대한 대도시의 응답

<블랙 래빗>이 <오자크>의 그림자 속에서 파헤친 것.

by 조하나



오자크의 유령, 맨해튼의 뒷골목을 배회하다


넷플릭스 범죄 스릴러의 문법을 새로 썼던 시리즈 <오자크>의 주인공, 제이슨 베이트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중산층의 지성과 냉철함으로 거대한 범죄 제국과 맞서던 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죠.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 절망과 혼돈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우리 앞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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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순한 캐릭터의 변화가 아닙니다. 넷플릭스가 야심 차게 선보인 8부작 미니시리즈 <블랙 래빗>은 <오자크>라는 거대한 유령을 스스로 불러내어, 그 익숙한 그림자 위에서 전혀 다른 비극을 직조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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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갈등은 단순 명료합니다. 뉴욕에서 가장 ‘힙한’ 레스토랑 ‘블랙 래빗’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제이크 프리드킨(주드 로)의 견고한 세계는, 감당할 수 없는 빚과 혼돈을 몰고 나타난 형 빈스(제이슨 베이트먼)의 귀환으로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광활하고 적막한 자연을 배경으로 했던 <오자크>의 무대는 이제 브루클린 다리 아래, 화려한 불빛과 어두운 그림자가 공존하는 맨해튼의 심장부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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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래빗>은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피를 빌려, ‘형제’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질긴 관계의 해부학을 시도합니다. <오자크>가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핵가족의 윤리가 어떻게 부식되는지를 탐구했다면, <블랙 래빗>은 도시라는 거대한 압력솥 안에서 형제간의 '공의존(codependency)'이라는 더 질식할 듯한 지옥도를 펼쳐 보이죠. 이는 단순히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계를 넘어, 한 사람의 문제적 행동(중독, 무책임 등)을 다른 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의존하며 지속시키는 병리적인 관계 패턴을 의미합니다. <블랙 래빗>에서 제이크가 형 빈스의 파괴적인 행동을 계속해서 수습해 주면서도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형에게 중독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공의존’ 관계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콘크리트 협곡 속에서, 유년의 트라우마와 타고난 기질은 증폭되고, 파멸은 피할 수 없는 중력처럼 두 사람을 심연으로 끌어당깁니다.















축복인 동시에 저주가 된 <오자크>의 유산


<블랙 래빗>과 <오자크>의 관계는 단순한 유사성을 넘어, 의도적으로 설계된 ‘서사적 평행이론’에 가깝습니다. 두 작품은 같은 문법을 공유하며 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이 과정에서 <블랙 래빗>은 전작의 후광과 그림자를 동시에 짊어집니다.



공유된 창작 및 스타일 DNA


두 작품의 연결고리는 제이슨 베이트먼이라는 배우 한 명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주연 배우이자 총괄 프로듀서이며, 시리즈의 톤을 결정하는 첫 두 에피소드의 감독까지 맡으며 <오자크>의 창조적 DNA를 <블랙 래빗>에 직접 이식합니다.


이 ‘오자크 동문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죠. <오자크>에서 웬디 버드 역으로 열연했던 로라 리니가 3, 4화의 감독으로 합류했으며, <오자크>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던 벤 세마노프 역시 연출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베이트먼은 로라 리니가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식의 탁월함을 높이 사 그녀를 직접 섭외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오자크>의 강점이었던 배우 중심의 밀도 높은 연기 앙상블을 계승하려는 뚜렷한 의도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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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노골적인 시각적 오마주는 매 에피소드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카드입니다. <오자크>가 그랬던 것처럼, <블랙 래빗> 역시 해당 에피소드의 핵심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암시하는 네 개의 상징적인 아이콘을 보여주죠. 이는 제작진이 두 작품의 연관성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비교하며 감상하길 권하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영리한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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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구조: 느린 연소와 필연적 추락


<블랙 래빗>과 <오자크>, 두 시리즈 모두 ‘느리게 타오르는(slow-burning)’ 스릴러의 전형을 따릅니다. 이야기는 서서히 점화되고, 인물들에게 닥치는 불행과 위기가 겹겹이 쌓이면서 긴장감을 증폭시킵니다. 마치 “하나의 장애물이 두 개의 새로운 장애물을 낳는, 빚더미에 짓눌리는 경험을 모방하도록 설계된 공포의 나선”과도 같죠. 인물들은 끊임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씨앗이 됩니다.



배경 설정이 규정하는 갈등의 본질


그러나 동일한 문법은 전혀 다른 배경을 만나 질적으로 다른 결과물을 낳습니다. <오자크>의 광활한 자연은 인물들에게 고립감과 실존적 공포를 안겨줍니다. 위험은 고요한 호수 표면 아래 숨어 있었고, 보이지 않기에 더욱 위협적이었죠.


반면 <블랙 래빗>의 뉴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적대자입니다. 제작자 잭 베일린과 케이트 서스먼은 뉴욕의 “전기적 소음”, “오물”, “잡음”을 포착하여 도시를 이야기의 능동적인 참여자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사프디 형제의 <언컷 젬스>를 연상시키는, 롱 렌즈를 활용한 촬영과 거친 질감의 미학은 질식할 듯한 폐소공포증과 관음증적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카메라는 종종 문틈이나 좁은 골목을 통해 인물들을 포착하거나, 압도적인 도시 풍경과 대비시켜 그들의 탈출구가 없음을 시각적으로 강조합니다. 광장공포증적인 공포를 암시했던 <오자크>의 드넓은 풍경과 달리, <블랙 래빗>의 뉴욕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감옥입니다. 과밀하고, 소란스러우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곳이죠. 바로 <블랙 래빗>이 ‘<오자크>에 대한 대도시 뉴욕의 응답’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배경의 차이는 갈등의 본질과 주제 의식의 차이로 직결됩니다. <오자크>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환상’ 속에서 핵가족의 생존과 도덕적 타락을 다루었다면, <블랙 래빗>은 ‘과거로부터의 불가피성’이라는 주제 아래 ‘형제간의 공의존’과 ‘유전된 트라우마’라는 더 깊은 심리적 지옥도를 파헤칩니다. 이는 제이슨 베이트먼이 연기하는 두 캐릭터의 원형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오자크>의 마티 버드가 계산적이고 지성적인 ‘해결사’였다면, <블랙 래빗>의 빈스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골칫덩어리’입니다. 베이트먼은 의도적으로 전작의 캐릭터를 전복시키며, 논리 대신 혼돈을 선택하는 인물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파멸을 그려냅니다.


이처럼 <오자크>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합니다. <오자크>의 핵심 제작진과 스타일적 유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은 기존 팬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마케팅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블랙 래빗>은 끊임없이 전작과 비교당하는 비평적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버드 가족의 지저분한 삶에는 미치지 못한다”거나 “<오자크>의 희석된 버전처럼 느껴진다”는 식의 평가는 이러한 비교의 필연적 결과물입니다. 결국 <오자크>의 후계자를 자처한 전략은 작품이 온전히 자신의 가치로 평가받을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역설을 낳았습니다. 그 유산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가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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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 제이슨 베이트먼과 주드 로가 빚어낸 파멸의 앙상블


<블랙 래빗>의 서사가 다소 삐걱거릴 때조차 시리즈를 굳건히 지탱하는 것은 제이슨 베이트먼과 주드 로, 두 배우가 뿜어내는 폭발적이고 중독적인 화학 작용입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의 모든 비평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지점은, 두 배우가 빚어내는 형제 관계의 역학이 이 시리즈의 부인할 수 없는 심장이자 가장 큰 성취라는 것이죠. 그들의 연기는 단순히 플롯을 전개시키는 도구를 넘어, 형제라는 관계가 어떻게 서로를 지탱하는 동시에 독이 되는지에 대한 심오한 탐구, 그 자체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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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 두 개의 연기


제이슨 베이트먼의 빈스: 이 역할은 <오자크>의 마티 버드에 대한 의도적인 안티테제입니다. 빈스는 계산적인 마티와 정반대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통제 불능의 “골칫덩어리(hot mess)”로 묘사됩니다. 베이트먼은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로 외양부터 파멸의 이미지를 각인시킵니다. 하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혐오스러우면서도 공감을 자아내는” 그의 “커리어 최고의 연기”라고 극찬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가 결국 자신의 “안전지대 연기”로 회귀하여, 진짜 마약 중독자나 살인자의 처절함보다는 칭얼대는 모습에 그쳤다고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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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 로의 제이크: 주드 로는 성공한 레스토랑 오너 제이크의 세련되고 매끄러운 외피가 점차 해져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그의 연기는 특유의 “음흉한 매력(sinister smarm)”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이면에 감춰진 취약함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이크는 형의 파괴적인 행동을 묵인하고 수습하는 조력자이자, 사실상 “형에게 중독된” 또 다른 중독자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겉으로 보이는 혼돈의 주범인 빈스보다 오히려 제이크가 더 깊이 “썩어있는” 인물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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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양면과 같은 형제의 얼굴


두 배우는 자신들의 연기 과정을 마치 “스포츠 경기를 하듯”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시너지를 만들어냈다고 회고합니다. 이러한 역학은 촬영 전, 줌(Zoom)을 통한 대본 개발 단계에서부터 이미 형성되었죠. 스크린 위에서 이들의 관계는 시리즈의 “생동감 넘치는 미스터리”이자 “중력의 중심”으로 기능합니다. 이는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의 역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뒤틀린 사랑과 충성, 배신이 어떻게 서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구속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는 ‘선한 형/악한 동생’이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적 구도를 영리하게 해체합니다. 처음에는 성공한 동생 제이크와 실패한 형 빈스의 대립 구도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이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집니다. 우리는 제이크의 성공이 사실은 빚과 불법적인 거래 위에 세워진 허상임을 알게 되고, 그 역시 빈스 못지않게 거짓말과 충동적인 선택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결국 시리즈가 보여주는 것은 선한 인물이 악한 인물에게 물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는 동일한 트라우마를 겪은 두 형제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병리적 증상을 드러내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 탐구에 가깝습니다. 제이크의 중독이 통제와 이미지라면, 빈스의 중독은 혼돈과 도피입니다. 그들은 결국 같은 동전의 양면이며,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인과관계를 넘어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닫힌 순환 고리를 형성합니다.


다시 말해, <블랙 래빗>의 서사를 이끄는 동력은 중독과 상호의존성이라는 내면의 강박적 순환 고리입니다. 빈스는 혼돈을 만들고, 제이크는 강박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며 이 병적인 순환을 지속시킵니다. 그들의 행동은 플롯의 관점에서는 비논리적일지 모르나,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비극적으로 논리적입니다. <블랙 래빗>은 두 남자가 마피아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에게서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죠. 쇼러너들이 빈스의 죽음을 제이크가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해방’이자 ‘분리’라고 설명한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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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이라는 무대의 연극: 도시 공간과 현대 사회에 대한 냉소적 초상


<블랙 래빗>은 단순한 범죄 드라마를 넘어, 현대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냉소적인 문화 비평으로 기능합니다. 시리즈의 제목이자 중심 무대인 레스토랑 ‘블랙 래빗’은 성공이라는 화려한 무대 뒤에 깊은 불안과 부채, 도덕적 부패를 숨기고 있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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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의 외관으로 사용된 곳은 로어 맨해튼의 워터 스트리트 279번지에 위치한, 현재는 폐업한 역사적인 건물 ‘브리지 카페(Bridge Cafe)’입니다. 이 장소의 실제 역사는 작품에 깊은 상징성을 부여합니다. 이 건물은 브루클린 브리지보다 먼저 지어졌으며, 과거 해적들의 술집이자 "끔찍한 살인"으로 악명 높았던 "사악한 살롱"이었다는 어두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이 장소를 선택함으로써, 대사 한 줄 없이도 ‘블랙 래빗’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폭력과 도덕적 부패의 역사를 불어넣었습니다. 클럽은 역사적 메아리의 방이 되며, 형제들이 마주한 어둠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도시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오래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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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클럽의 내부와 분위기는 실제 뉴욕의 핫플레이스였던 ‘스포티드 피그(The Spotted Pig)’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레스토랑은 성희롱과 독성 강한 어두운 이면에 대한 폭로가 잇따르며 2020년에 문을 닫은 곳입니다. 따라서 ‘블랙 래빗’은 제이크 자신에 대한 은유가 됩니다. 세심하게 관리된 성공적인 외관 뒤에 비밀과 위험, 부패의 토대를 숨기고 있는 것이죠. 이는 성공이 종종 도덕적 타협 위에 세워지는 '아메리칸드림'의 위태로움을 상징합니다.




소우주로서의 레스토랑


제작자 베일린과 서스먼은 “레스토랑은 연극이다. 모두가 역할을 연기하고, 관객은 결코 무대 뒤의 혼돈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며 자신들의 의도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블랙 래빗’은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헤지펀드 투자자, 셀러브리티, 길거리의 범죄자와 사기꾼들이 한데 뒤섞여 계급과 권력의 역학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용광로와 같습니다.


트렌디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파산 직전에 놓인 레스토랑의 재정 상태는, 이미지와 신용 위에 세워진 현대 경제와 주인공들의 위태로운 삶을 동시에 반영합니다. 한 비평가의 지적처럼, 이곳은 마치 “팬데믹 이전 뉴욕 밤 문화의 유물”처럼 느껴지며, 지나간 과잉의 시대에 대한 향수와 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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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진짜 주인공, 압력솥 같은 뉴욕이라는 도시


감독들은 코니 아일랜드, 러시아 & 터키식 목욕탕, 타임스 스퀘어 등 실제 뉴욕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촬영하며 도시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압축된 도시 풍경과 멀리서 훔쳐보는 듯한 롱 렌즈 촬영은 감시당하고 갇혀 있다는 느낌을 극대화합니다. 여기서 뉴욕은 기회의 땅이 아닌, 출구 없는 미로 감옥이죠. 주드 로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도시”라고 말했듯, 이 무자비한 환경의 압력이야말로 형제의 결점을 증폭시키고 그들을 필연적인 파멸로 몰아가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현대적 야망과 남성성에 대한 비판


시리즈는 “유산, 정당성, 야망, 그리고 감정적 억압”과 씨름하는 현대 남성들의 초상을 그립니다. 두 형제는 너바나를 연상시키는 록 밴드 스타였던 과거의 영광에 갇혀 있으며, 그 유산을 재현하거나 혹은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시도 속에서 발버둥 칩니다. 또한, 시리즈는 권력 있는 단골손님이 여성 직원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하위 플롯을 통해 #MeToo 시대의 문제의식을 건드립니다. 제이크가 이 문제를 무책임하게 회피하면서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는데, 이는 성공을 위해 묵인되는 도덕적 타협과 유독한 직장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로 작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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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래빗>을 향한 엇갈린 시선들


<블랙 래빗>은 공개 이후 비평가와 시청자들로부터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양극화된 반응은 시리즈의 예술적 선택과 ‘프레스티지 드라마’에 대한 현대 관객의 기대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가 됩니다.



긍정적 평가: 긴장감 넘치는 ‘HBO급’ 스릴러


시리즈를 호평하는 측은 숨 막히는 긴장감과 높은 몰입도를 주된 강점으로 꼽습니다. “거칠고 스릴 넘치며 매혹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인기 드라마 <더 베어>와 영화 <언컷 젬스>의 만남에 비유하기도 하죠. 많은 시청자들은 이 작품이 일반적인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수준을 뛰어넘는 ‘HBO급’ 퀄리티를 보여주며, 플랫폼 역사상 “최고의 미니시리즈 중 하나”라고 극찬했습니다.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 뉴욕이라는 배경의 효과적인 활용, 감각적인 연출 등은 긍정적 평가의 공통된 요소였습니다.



부정적 평가: ‘과장된 불행 포르노’


반면, 혹평하는 측은 시리즈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합니다. “가차 없이 암울하다”거나 “서사적 고문의 연속”이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으며, ‘불행’이라는 단어가 부정적 리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길고 지루한 에피소드 길이와 답답한 전개 속도 역시 주요 비판 대상이었죠. 많은 이들은 8시간짜리 시리즈가 아닌 2시간 30분짜리 영화로 만들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비호감적인 성격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감정 이입의 큰 장벽으로 작용했습니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주인공들에게 “관심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며, 이는 결국 만족스럽지 못한 시청 경험으로 이어졌죠. 또한, <브레이킹 배드>나 <오자크> 같은 뛰어난 범죄 드라마의 플롯을 답습하면서도, 비논리적인 인물들의 선택과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서브플롯들이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국내외 시청자 반응


레딧(Reddit)과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반응 역시 비평가들의 평가처럼 양분되었습니다. 일부 사용자들은 형제간의 유독한 관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며 극찬했고, 날것 그대로의 강렬함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반면, 다른 사용자들은 주인공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라며 “나쁜 형제가 모두를 나락으로 끌고 가는”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 대한 불만도 제기되었는데, 특히 화면이 지나치게 어두워 밝기를 최대로 높여야만 했다는 의견이 공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블랙 래빗>을 둘러싼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는 스트리밍 시대의 ‘프레스티지 TV’가 처한 딜레마를 반영합니다. 한때 <소프라노스> 이후 텔레비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어두운 톤, 비호감 안티히어로, 느린 전개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작품성의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긍정적 평가는 이러한 요소들을 여전히 성숙한 드라마의 미덕으로 간주하며 ‘HBO급’이라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부정적 평가는 바로 그 요소들을 “전형적인 넷플릭스 프레스티지 드라마의 수프” 혹은 “과장된 불행의 전시”라고 비판하며, 깊이 대신 피로감을 유발하는 낡은 공식으로 치부합니다. 결국 <블랙 래빗>에 대한 논쟁은 2025년 현재, 무엇이 ‘명품’ 드라마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더 큰 담론의 축소판인 셈입니다.







토끼굴 너머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


결론적으로 <블랙 래빗>은 흠결이 있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공생과 파괴로 점철된 형제 관계에 대한 탐구입니다. 이 시리즈의 진정한 성공은 치밀한 플롯보다는, 두 주연 배우의 혼신을 다한 연기로 구현된 그 관계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적 진실성에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공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 관념을 비추는 어두운 거울과 같습니다. 꿈을 향한 열망이 어떻게 악몽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제목이 암시하는 ‘토끼굴’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빚과 중독, 그리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중력이라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배우 주드 로는 관객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 “상처 입은 두 인간 사이의 사랑”과 마지막에 남는 “아름답고 미묘한 희망의 뉘앙스”를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은, 이 지독한 여정을 끝까지 함께한 시청자들의 몫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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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잡하고도 불편한 작품을 더 깊이 있게 감상하기 위한 몇 가지 포인트를 제안합니다.


베이트먼의 역설: 제이슨 베이트먼의 연기를 독립적으로 보기보다, <오자크>의 마티 버드와 나누는 대화처럼 감상해 보세요. 그의 계산적인 마티 페르소나가 빈스의 충동적인 혼돈과 충돌하는 순간들을 포착하면, 배우의 흥미로운 메타 퍼포먼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캐릭터로서의 레스토랑: ‘블랙 래빗’이라는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시각적 서사에 주목해 보세요. 조명은 어떻게 변하는가? ‘무대 뒤’의 혼돈은 ‘무대 앞’의 연기와 어떻게 대비되는가? 이 공간을 두 형제의 내면 상태를 비추는 바로미터로 삼아보는 겁니다.


악당의 정적(靜寂): 갱스터 만쿠소를 연기한 트로이 코처의 연기를 눈여겨보세요. 영화 <코다>로 청각 장애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그는 광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이 시리즈에서, 자신만의 조용하고 자신감 넘치는 정적으로 엄청난 위협감을 자아냈습니다. 베이트먼이 언급했듯, 코처는 목소리 없이도 엄청난 무게감과 냉혹함을 전달하며 범죄 보스에 대한 장르적 관습에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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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꿈의 사운드트랙: 빈스와 제이크 형제가 밴드로 활동할 때 연주했던 90년대 펑크 록(더 스트록스의 앨버트 해먼드 주니어가 작곡)부터 더 워크맨과 너바나의 삽입곡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선택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음악은 그들의 실패한 야망과 과거의 유령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우울한 장치로 기능합니다. 또한, <오자크>에 이어 <블랙 래빗>에서도 음악을 맡은 대니 벤시와 손더 주리안스가 불길하고 파멸적인 분위기의 뒤틀린 현악기와 금속성 파동, 지하의 베이스음이 모든 장면을 카운트다운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불안의 사운드로 이 시리즈의 질식할 듯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에는 시각만큼이나 청각 역시 한몫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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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관계의 추이: 시리즈의 심장은 제이크와 빈스 사이의 줄다리기입니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 누가 보호자이고 누가 희생자인지, 그 미묘한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의 역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끊임없이 재협상되는 위태로운 춤과도 같습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깊은 진실은 바로 그 춤사위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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