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고통의 돌을 주워 모으는 사람들을 위하여 | 영화 <스티브>
망가진 세상에서 아이들을 구하려는 어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른 자신이 이미 망가져 있다면, 그 구원은 과연 가능한 걸까요? 혹은, 그 구원의 몸짓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파괴는 아닐까요? 팀 밀런츠 감독의 <스티브>는 이처럼 불편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나 <클래스>와 같은 ‘영감을 주는 교사’ 장르의 계보를 잇는 대신, 이러한 장르가 약속하는 구원 서사를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해체합니다. <스티브>는 희망과 성장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돌봄과 교육 제도의 시스템적 붕괴가 개인의 영혼을 어떻게 잠식하는지에 대한 집요하고도 아픈 보고서입니다.
<스티브>는 ‘망가진 교육 시스템에 대한 열정적이고 격렬한 묘사’로 평가받으며, 전통적인 교육 드라마가 제공하는 감상적인 위로나 명쾌한 해법을 거부합니다. 대신, 해결되지 않는 혼돈과 모호한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의 핵심 논지는 돌봄의 실패가 개인의 실패가 아닌, ‘사회 구조 전체의 실패’라는 점을 폭로하는 데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즉 돌보는 자와 돌봄 받는 자 모두가 동일한 시스템의 희생자로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스티브>는 배우 킬리언 머피, 작가 맥스 포터, 그리고 감독 팀 밀런츠라는 세 창작자의 깊은 신뢰와 예술적 공감대 위에서 탄생한 인디 영화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머피와 밀런츠의 세 번째 협업으로, 두 사람은 이전 작품들인 <피키 블라인더스>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통해 이미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취향을 공유하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작가 맥스 포터가 2023년에 출간한 소설 <샤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포터는 소설이 주인공의 내면에 깊이 파고드는 형식 때문에 영화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각본을 쓰기로 결심하며 새로운 관점을 모색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원작의 1인칭 주인공이었던 학생 ‘샤이’에서 교장 ‘스티브’로 이야기의 중심을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는 배우 킬리언 머피를 염두에 두고 스티브라는 캐릭터를 구체화했다고 합니다.
머피와 포터는 이전부터 책, 음악,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공유하며 함께 깊이 파고들 만한 프로젝트를 찾고 있었습니다. 머피는 출간 전 원고 상태의 <샤이>를 미리 받아볼 정도로 이 이야기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머피에게 개인적인 의미가 컸습니다. 그의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모두 교사였기 때문에, 그는 이 영화가 “자주 조명받지 못하는 교육자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교사라는 직업이 “감정적으로 매우 고된 일”이며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라고 언급하며, 캐릭터에 대한 깊은 공감을 표했습니다.
감독 팀 밀런츠는 벨기에 출신으로, <더 리스폰더>, <윌>, <패트릭> 등 다수의 장편 영화와 <피키 블라인더스>, <리전> 같은 TV 시리즈를 연출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속 인터뷰 장면의 사실성을 높였으며, 화가처럼 마음속으로 장면을 구축하는 시각적인 연출가로 평가받습니다. 밀런츠는 “스티브라는 캐릭터가 완벽하지 않고 취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들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불완전함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는 킬리언 머피가 자신의 제작사 ‘빅 띵스 필름(Big Things Films)’을 통해 제작한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작자로서 머피는 배우와 제작진에게 특별한 선물을 제공했는데, 바로 영화 전체를 시간 순서대로 촬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배우가 캐릭터가 겪는 상황을 그대로 경험하게 해준다”며,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배우들이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었고, 9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깊은 감정적 여운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제작진의 깊은 신뢰와 예술적 공감대는 팀 밀런츠 감독의 독특하고 강렬한 연출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생생하게 숨 쉬게 됩니다.
팀 밀런츠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영화의 주제인 심리적, 시스템적 붕괴를 관객이 직접 체감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치입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미학을 채택함으로써, 스탠튼 우드라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물리적으로 구현된 공간으로 탈바꿈시킵니다.
영화의 연출은 근본적으로 정신없고, 산만하고, 시끄러운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을 기반으로 합니다. 프랑스 누벨바그 이후 등장한 이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적 진실’을 추구합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안정된 프레임을 거부하며, 관객을 스탠튼 우드의 대혼돈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단순히 현장감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등장인물들이 겪는 정서적, 제도적 불안정성을 시각적으로 체화합니다. 안정된 구도의 부재는 곧 안정된 삶의 부재를 의미하며, 관객은 편안한 관찰자의 위치를 박탈당한 채, 영화 속 인물들이 느끼는 광적인 에너지와 불안감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날것 그대로의 시각적 미학은 질주하는 드럼 앤 베이스 사운드트랙과 결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빠르고 맥동하는 이 사운드트랙은 스탠튼 우드라는 공간의 집단적 심장 박동처럼 기능합니다. 불규칙하고, 불안하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으로 가득 찬 이 음악은 스티브와 샤이 같은 인물들의 내면적 혼란을 외부로 표출하는 장치입니다. 음향 디자인은 인물들이 처한 답답하고 압도적인 압박감을 반영하는, 관객의 신경계를 끊임없이 할퀴는 ‘소리의 벽’을 만들어 내며 시각적 혼돈과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여기에 감독은 취재를 위해 스탠튼 우드를 찾은 촬영팀의 가짜 아카이브 영상을 삽입하여 ‘극중극(film within a film)’ 구조를 만들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드론 숏’이나 카메라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과 같은 실험적인 기법까지 사용합니다. 거친 다큐멘터리 영상과 사회 사실주의가 혼합된 이 형식은 등장인물들의 파편화된 현실을 반영하며, 무의미해 보이는 실험적 숏들은 서사의 일관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합니다. 이는 마치 시각적으로 구현된 공황 발작과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연출 전략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핵심 주제와 직결됩니다. 영화의 끊임없는 속도와 고조되는 혼돈은 관객에게 만족스러운 해소, 즉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혼돈은 결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설계된 혼돈의 미학이 스크린 위에 구현해 내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잔해 속에서 서로의 거울이 되어버린 두 영혼, 스티브와 샤이의 위태로운 초상입니다.
<스티브>의 서사적 핵은 교사와 학생이라는 단순한 관계를 넘어, 동일한 시스템이 낳은 공생적 산물이자 서로의 거울상인 스티브와 샤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을 통해, ‘상처 입은 자만이 타인의 상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통찰과 함께, 그 공감이 어떻게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탐색합니다. 이들은 붕괴하는 시스템이 개인에게 가하는 트라우마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체화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한 면은, 구원자를 자처하는 스티브입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교장인 동시에,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정신 건강 문제와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알코올 및 약물 중독자입니다. 킬리언 머피는 이 스티브라는 인물을 “학생들을 너무나 맹렬히 믿어서 스스로 부서지고 있는 남자”로 그려냅니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며, 결함 많고 모순적인 인물로, 자신을 돌보기보다 타인을 우선시하는 자기 파괴적인 이타심을 보입니다. 학생들을 ‘고치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자기 자신을 고칠 수 없다는 무력감의 투영입니다. 그는 더 이상 안내자가 아닙니다. 그저, 파멸의 회전목마에 갇힌 또 다른 수감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회전목마의 반대편에는, 스티브가 그토록 구원하고자 했던 자신의 또 다른 모습, 샤이가 앉아 있습니다. 샤이는 ‘우울하고, 분노에 가득하며, 지루하다’라고 스스로를 묘사하는 소년입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단절되고,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시달립니다. 그는 사회로부터 버려진 세대의 젊음을 대표하며, 그의 공격성은 거절당한 자의 깊은 취약성과 고통을 가리기 위한 위태로운 방패입니다. 샤이는 시스템 실패의 가장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상징이며, 사회가 외면한 상처 그 자체입니다. 그의 존재는 스탠튼 우드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사회가 내버린 아이들을 수용하는 마지막 쓰레기 처리장임을 상기시킵니다.
이처럼 스티브와 샤이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자 시스템이 외면한 상처 그 자체로서,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파멸을 확인하는 비극적인 거울상입니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의 공생적 고통을 영화 곳곳에 배치된 강력한 상징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의미로 심화시킵니다.
<스티브>는 제도적 부패, 사회적 심판, 그리고 주체성을 향한 필사적인 투쟁과 같은 추상적인 힘들을 구체적인 시각적, 서사적 상징으로 전달합니다.
그 첫 번째 상징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심판하는 ‘침입적인 렌즈’입니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학교를 폭로하기 위해 스탠튼 우드를 침범하며, 그들의 존재는 갈등을 유발하고 인물들을 더욱 압박합니다. 그들의 렌즈는 이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심판과 착취를 위한 무기입니다. 특히 “자신을 세 단어로 묘사한다면?”이라는 질문은, 인물들의 복잡한 고통을 언론이 소비하기 좋은 짧은 인용구로 축소하도록 강요합니다. 이러한 인터뷰 형식은 세속화되고 실패한 형태의 종교적 고해성사를 연상시킵니다. 등장인물들은 영혼을 드러내도록 요구받지만, 인터뷰어, 즉 사회는 용서나 은총 대신 오직 판단만을 내립니다.
이러한 사회적 감시는 붕괴 직전인 스탠튼 우드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낡아빠진 오래된 저택, 즉 ‘허물어져 가는 건물’ 자체가 두 번째 상징입니다. 청소되지 않은 방들과 무질서한 교실을 가진 이 허름한 공간은 매각될 예정이며, 학교는 곧 문을 닫을 운명입니다. 학교의 물리적 상태는 그것이 대표하는 사회 복지 시스템의 상태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가 됩니다. 이 쇠락은 방치와 자금 부족, 그리고 재활과 돌봄이라는 이상의 점진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쇠락한 공간 속에서, 시스템의 실패가 낳은 가장 처절한 상징이 등장합니다. 바로 샤이가 짊어진 ‘생존의 돌멩이’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샤이는 돌로 가득 찬 배낭을 메고 연못으로 향합니다. 그의 배낭 속 돌멩이들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날의 공기, 친구의 주먹에 터져나간 입술의 비릿함,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응축된 침묵의 비명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 그 돌을 던져 창문을 부수고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자기 파괴의 도구였던 돌멩이가 폭력적인 재진입의 도구로 변모하는,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상징적 행위입니다. 창문을 부수는 행위는 분노의 외침이자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는 필사적인 존재의 증명입니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존재’와 ‘주체성’을 위한 선택입니다.
교실 벽에 걸린 ‘해안 침식(Coastal Carving)’ 사진과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실제 해안 풍경은 샤이의 내면과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각적 은유입니다. ‘해안 침식’은 파도와 바람 같은 자연의 힘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해안선을 깎아내고 변화시키는 현상으로, 샤이가 겪는 정서적 침식, 즉 그의 내면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과정과 평행을 이룹니다. 샤이가 모으는 돌멩이들은 바로 이 침식 과정의 물리적 결과물이며, 그가 겪은 상처와 고통의 구체적인 파편들입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 해안 침식으로 만들어진 광활하고도 평온한 해안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이 상징을 확장합니다. 이 장면은 샤이의 개인적인 고통을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자연의 순환 과정 속에 위치시킵니다. 침식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지형을 새롭게 ‘조각(carving)’하는 창조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샤이가 연못에 들어가는 대신 돌멩이로 학교 창문을 부수는 행위는, 이 창조적 파괴의 인간적 버전입니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던 고통의 무게, 즉 돌멩이를 자기 파괴가 아닌, 자신을 억압하는 환경을 부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에너지로 전환합니다.
고통의 심연에 깊이 잠식된 이에게 침식 후의 멋진 모습만을 들이대며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라 닦달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고통의 과정을 함께 하고 지켜봐 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며 견뎌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샤이’에게도, ‘스티브’에게도,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스티브>는 1990년대 중반 영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서사는 특정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한 교육 위기의 보편적인 징후들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교권 추락’과 교육 시스템의 붕괴 현상은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궤적을 그립니다. 영화는 제도적 지원 없이 학생, 관료주의, 외부의 감시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다 결국 번아웃과 정신적 붕괴에 이르는 한 교사의 초상을 그립니다.
한국 사회의 담론은 때때로 이 문제를 ‘교권’과 ‘학생 인권’의 대립 구도로 프레임화하곤 합니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것이 잘못된 이분법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스티브와 샤이는 모두 동일한 망가진 시스템의 희생자입니다. 영화는 자원과 공감이 고갈된 시스템 안에서 교사와 학생의 권리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며, 함께 붕괴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교사가 지지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진정한 학생의 행복은 불가능하며, 학생들이 깊은 위기 속에 있을 때 효과적인 교육은 불가능합니다.
<스티브>는 사회 문제의 개인화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스티브가 묘사한 ‘파멸의 회전목마’는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는 외면해 버린 정치적, 경제적 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개인행동의 혼란스러운 전경 너머에 있는 시스템적 부패와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배경을 직시하라고 촉구합니다.
시스템 붕괴에 직면하여 스티브가 사용하는 유일한 도구는 급진적 공감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것이 지속 불가능하고 자기 파괴적인 저항의 한 형태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공감은 엄청난 개인적 대가를 치르게 하며, 그의 중독과 정신 건강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이 영화는 ‘희생적인 교사’의 낭만화에 대한 경고이며, 진정한 돌봄은 개인화될 것이 아니라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티브>는 제도적 실패의 폐허 속에서 남는 것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지극히 인간적인 개인 간의 연결뿐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남깁니다. 영화의 모호한 결말은 쉬운 해결책은 없다는 가장 정직한 진술이기도 합니다. 샤이는 생존을 선택했지만 그 방식은 파괴적이었고, 스티브는 구원의 순간에조차 무력하게 넘어져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스티브>는 우리 시대에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지독히 불편한 대화를 이끌어냅니다. 이 영화는 청소년과 그들을 돌보는 책임을 진 사람들 모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방치를 거울처럼 비춥니다. 그리고 서두에서 던졌던 그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듭니다. "누가 구원자를 구원하는가?"
이 영화의 힘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우리의 집단적 실패가 낳은 파괴적인 인간적 결과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라는 거대한 스탠튼 우드 안에서, 우리는 스티브입니까, 샤이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고통을 침입적인 렌즈로 관망하는 방관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