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농담
(스포일러 있습니다)
‘트루먼 셰이디(Truman Shady)’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변성현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는 바로 이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의 그럴듯한 명언을 처음부터 천연덕스럽고 능글맞게 들이미는, 그야말로 '거대한 농담' 같은 작품입니다.
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 트루먼 셰이디 -
이 오프닝의 재치는 변성현 감독의 <굿뉴스>를 이해하는 좋은 키가 됩니다. 일단 ‘트루먼 셰이디’라는 이름부터가 미심쩍죠. ‘진실한 인간, True-man’과 ‘수상쩍음, Shady’의 결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입니다.
'트루먼'은 완전히 조작된 현실 속에서 진실인 양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 영화 <트루먼 쇼>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앞으로 당신이 보게 될 모든 건 조작된 현실’이라고 암시합니다. 그리고 '섀이디'는 속임수와 도덕적 모호함을 가리키죠. 따라서 '트루먼 섀이디'라는 이름은 진실과 거짓이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정치와 미디어의 세계에서는 서로 뒤엉켜 공존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변성현 감독 스스로 "이 가짜 명언에서 영화의 서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듯, 영화는 이 트루먼 섀이디의 명언을 통해 모든 진실이 의심스러운 세계로의 항해를 예고합니다. '권위'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모든 것, 정치인, 권력자, 언론인 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라고 말이죠. 동시에 영화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조작된 서사를 우리는 또 얼마나 기꺼이 믿으려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굿뉴스>의 블랙코미디는 심각한 역사적 사건에 덧씌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독은 역사적 사건과 기록 자체가 이미 한 편의 부조리극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안에 내재된 희극성을 발굴하고 증폭시키는 방식을 택했죠.
영화의 뼈대가 된 사건은 1970년 3월 31일 발생한 일본항공 351편, 일명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입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비극과 희극의 경계는 모호하죠. 일본의 극좌파 학생 조직 ‘적군파’ 소속 단원 9명은 승객과 승무원 129명을 태운 여객기를 납치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혁명의 성지, 북한 평양으로 가는 것이었죠.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들이 휘두른 일본도와 폭탄, 권총은 모두 문구점에서 구입한 모조품과 장난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순진한 혁명 정신을 지탱한 것이 당대 최고의 인기 만화 <내일의 죠>였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얼마나 비극적인 낭만주의와 희극적 치기로 가득했는지를 암시합니다.
진정한 코미디는 비행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진입하면서 시작됩니다. 북한으로 향하던 요도호를 착륙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는 김포공항을 평양 순안공항으로 위장하는 기만 작전을 펼치죠. 군인들은 북한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공항에는 급조된 환영 플래카드가 내걸립니다. 이는 한 국가가 주도한 거대한 연극 무대와 다름 없었죠. 그러나 이 어설픈 연극은 사소한 것들로 허무하게 막을 내립니다. 납치범들이 활주로에서 평양에 있을 리 없는 미국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사의 민항기와 흑인 미군 병사를 발견하면서 위장 작전이 탄로난 것이죠. 며칠간의 대치 끝에,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이 인질들을 대신해 비행기에 오르는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벌어진 어설픈 연극과 예상치 못한 실패는 역사적 사건, 그 자체로 완벽한 블랙코미디의 플롯이 됩니다.
변성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고도로 잘 만들어진 연극적 세계를 통해 도전과 실험을 감행합니다. 감독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굿뉴스>가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 묘사보다는 '소동극'이자 '우화'처럼 보이길 원했다고 밝혔습니다. 제작진 사이의 구호가 "은은하게 돌아있자"였을 만큼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둡니다. 물론 제작진은 당시 실제 사용됐던 보잉 727 기종의 폐비행기를 구입해 촬영하는 등 디테일에 공을 들였지만, 그 목표 자체가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오히려 만질 수 있을 듯 생생한 역사의 질감을 구현한 뒤, 그 위에 노골적인 허구를 덧씌워 관객을 ‘실재했던 사건’과 ‘그것을 둘러싼 허구적 서사’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세웁니다.
이러한 접근은 상징적인 색채 활용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영화는 뜨거운 이념과 격앙된 감정이 충돌하는 작전 지휘실을 강렬한 주황색으로, 냉철하고 관료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관제탑을 차가운 푸른색으로 설정합니다. 이 색채 대비는 공간을 구분하는 기능을 넘어 뜨거운 이데올로기와 차가운 관료주의 현실 사이의 충돌이라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죠.
<굿뉴스>의 서사 기법을 이야기할 때 20세기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를 빼놓을 수 없겠죠. 우리말로는 ‘낯설게 하기’ 또는 ‘거리두기’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관객이 극에 감정적으로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대신 한 걸음 떨어져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도록 유도하는 연극 기법을 말하는데요. 전통적인 극이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들며 극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면, 브레히트는 이러한 감정적 몰입이 관객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굿뉴스>는 이 기법을 영화 언어로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영화 속에 들어오지 말고 떨어져서 봐달라”는 감독의 주문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인공 ‘아무개’가 제4의 벽인 스크린을 파괴하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장면들입니다. 이는 “지금 당신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죠. 관객은 더 이상 이야기의 수동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냉소적인 관찰자이자 분석가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습니다.
감독은 배우들에게 현실적인 톤에서 벗어난 “과장된 연기”를 의도적으로 주문했는데요. 이는 관객이 인물의 심리에 깊이 동화되는 것을 막고, 대신 그들이 특정 사회적 유형이나 기능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물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리얼리즘을 지향하기보다, 캐릭터의 본질을 무대 위에서 프리젠테이션 하는 데 중점을 두죠.
영화는 총 5개의 챕터로 나뉜 형식을 취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서사의 유기적인 흐름을 인위적으로 끊어, 관객이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기보다 각 챕터가 제시하는 상황과 아이러니를 독립적으로 분석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브레히트적 장치들은 한국의 역사 영화 제작 관습에 대한 도발적인 방법론적 비판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동안 많은 한국 영화들이 역사적 사건을 엄숙하고 진중한 태도로 접근하며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거나 강한 감정적 동일시를 유도해왔습니다. 그런데 변성현 감독의 <굿뉴스>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죠. 그는 인질이나 납치범들의 사연이나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오직 지상에서 벌어지는 권력자들의 희극적인 행태에만 집중합니다. 활주로에서 인물이 반복적으로 미끄러지는 슬랩스틱 장면을 삽입하는 등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바꾸는 과감한 톤의 변화는, 역사를 애도하는 대신 그 안의 부조리를 조롱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합니다. 이는 어쩌면 역사의 트라우마를 소화하는 방식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세대적 변화의 징후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굿뉴스>는 관객에게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역사적 서사 속에 내재된 부조리의 상황을 관객에게 능동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굿뉴스>의 인물들은 사실적 묘사보다 정치적 원형을 풍자적으로 구현한 '캐리커처'에 가깝습니다. 설경구가 연기한 '아무개'는 이름 그대로 이름 없는 자, 즉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보이지 않는 비인격적 부품을 상징합니다. 그는 권력자들을 위해 편리한 현실을 조작하고 판을 깔아주는 정체불명의 '해결사'죠. 설경구는 이 역할을 '투명인간'에 비유하며, 다른 인물들과 의도적으로 섞이지 않고 오직 관찰자로서 존재하는 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감정의 폭발 대신 철저한 억제와 거리두기를 통해,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지우고 연기해야만 하는 인간의 '공허함'을 담아냅니다. 그는 이 부조리한 연극을 안내하는 냉소적인 해설자이자 감독의 아바타로서 역할을 해내죠.
류승범의 '박상현'은 권력의 신화를 해체하는 인물입니다. 변성현 감독은 '음울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클리셰를 깨기 위해 12시간의 설득 끝에 류승범을 캐스팅했다고 하죠. 류승범은 이 인물을 근본적으로 미성숙한 인물로 해석하고, 이념가나 애국자가 아닌, 국제적 위기 상황을 자신의 권력을 위한 '한 판의 게임'으로 즐기는 나르시시스트적 예술가로 그려냅니다. 배우의 가장 빛나는 선택은 충청도 사투리죠. 문화적으로 충청도 사투리는 느리고 에둘러 말하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는데 , 이러한 언어적 특성은 박상현의 이중성과 영화 전체의 주제인 겉과 속, 진실과 거짓의 충돌을 완벽하게 표현합니다. 술 대신 흰 우유를 마시고, 강박적으로 볼펜을 세우는 등의 자잘한 행동들은 군사 독재 시절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권력자의 위엄을 모두 벗겨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경질적이고 유치하고 미성숙한, 한 인간의 내면을 폭로하는 거죠.
영화 초반엔 류승범의 연기가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하나의 부조리한 연극 무대처럼 보이고자 한 감독의 의도를 잘 파악한 영리하고 대담한 연기였다는 걸 관객들은 결국 알게 됩니다. 류승범은 천상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미세한 얼굴 근육 하나 하나까지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것마저도 관객이 모르도록 하는 천연덕스러움까지 갖춘 훌륭한 배우입니다.
홍경이 연기한 공군 중위 ‘서고명’은 기괴한 인물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원칙과 논리,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엘리트 청년이죠. 그의 이름 ‘고명(告名)’은 ‘이름을 알린다’는 뜻으로, 공을 세워 출세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개(無名)’의 지도를 받게 되는 설정은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
자신감 넘치고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던 그가 권력의 부조리한 논리 앞에서 점차 환멸을 느끼고 희극의 공모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순수한 이상이 권력의 비합리성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변질되고 무력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초상이기도 합니다.
<굿뉴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보다 배우 홍경의 마스크가 굉장히 신선하고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손흥민과 송중기, 조승우, 김무열이 다 보입니다. 카우보이 분장에 주근깨 박힌 메이크업을 했을 땐 <고고70> 차차의 얼굴까지도요.
아직 자신의 얼굴이 확실하지 않은 배우를 '서고명' 역에 캐스팅한 건 감독의 멋진 판단이었습니다. 홍경은 여백이 많은 마스크에 순수함과 열정, 장난기, 반항기, 오만함 등 다채로운 감정을 그득 담아냅니다.
전도연이 특별출연한 영부인 캐릭터는 영화의 가장 도발적인 풍자입니다. 감독은 이 캐릭터가 특정 역사적 인물이나 현대 정치인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며, 관료주의 자체를 풍자하기 위해 만든 복합적인 캐릭터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 저는 감독이 참 능글맞게 잘 빠져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 당시 대통령은 박정희, 영부인은 육영수였습니다. 하지만 <굿뉴스>의 영부인은 숙취에 시달리는 대통령을 대신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 나타났다는 설정, 상황에 맞지 않는 과도한 의상(특히 흰 장갑)부터 걸음걸이, 표정, 말투, 제스처, 심지어 슬리퍼로 갈아신는 모습까지 모든 게 얼마 전 탄핵된 대통령의 영부인을 떠올립니다. 아이러니한 지점은 감독의 태도입니다. 그는 시종일관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두려 하지만, 유일하게 이 영부인 등장 장면에서는 그 거리를 역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2025년의 캐리커처를 1970년에 등장시켜, 거리를 유지하던 관객을 갑자기 영화 속으로 확 끌어들이는 것이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저처럼 소소한 충격과 흥미를 느꼈을 거라고 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군사 독재 시절은 혹독한 검열의 시대였습니다. 당시 영화의 정치 풍자는 금기시되었고, 체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철저히 억압되었죠. <굿뉴스>는 2025년 현재의 '표현의 자유'를 빌려 과거의 억압된 부조리를 소환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감독은 오히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안전한 무대이자 명분으로 삼아 현재의 정치 지형과 리더십에 대한 날카롭고 위험한 비판을 밀고 나가는 영리한 줄타기를 한 것 같습니다. 물론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고요. 하지만 만약 김건희가 여전히 영부인이었다면 과연 영화 속 이 장면이 아무 탈 없이 공개되었을지 의문입니다. 2025년인 지금도 말입니다. 그러한 의문조차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펼쳐지는 동안, 그녀는 초조하거나 긴장하는 기색 없이 평온하고, 심지어 지루해 보이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현실과 완벽하게 격리된 최고 권력층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모습인데, 정작 자신은 권력에 취해 알 수 없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권력이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부조리한 형태로 수행되는 연극'이라는 영화의 핵심 주장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의 핵심 인물들은 정치 서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박상현은 오로지 미학과 영향력에만 관심 있는 연극의 ‘연출가’이고, 서고명은 자신이 받은 대본(애국심, 의무)을 진심으로 믿는 ‘배우’이며, 아무개는 이 모든 판을 짜고(가짜 명언) 한 걸음 떨어져 관망하는 ‘작가이자 비평가’입니다. <굿뉴스>는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대중에게 소비될 ‘뉴스’와 ‘역사’가 어떻게 냉소적인 작가, 나르시시스트적인 연출가, 그리고 순진한 배우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다 보면 오늘 날의 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는 '과거'를 통해 '현재' 정치의 연극성, 관료주의의 부조리, 그리고 넘쳐나는 가짜 뉴스 등 우리 시대의 불안을 날카롭게 비판하죠.
김포공항에 ‘가짜 평양’을 건설하는 과정은 ‘가짜 뉴스’와 ‘대안적 사실’이 생산되고 유포되는 현대의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목표는 동일합니다. 특정 대상을 속이기 위해 그럴듯하지만 완전히 거짓된 현실을 구축하는 것. 영화의 제목인 ‘굿뉴스’ 역시, 사건의 추악한 진실을 덮고 대중에게 포장되어 전달되는 ‘좋은 소식’의 기만성을 비꼬는 아이러니입니다.
한편, 영화는 비행기 납치라는 돌발 상황을 통해 냉전 시대 한국, 일본, 미국의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한국을 ‘독재국가’라 무시하는 일본, 일본을 ‘아직도 왕을 섬기는 나라’라 비웃는 한국, 그리고 이 둘을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미국. 이들의 상호 경멸과 자격지심은 위기 앞에서 속절없이 터져 나오죠.
이 아시아의 부조리극 전반에 흐르는 배경음악이 바로 재즈의 아이콘,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북한으로 가려는 일본 혁명가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남한의 촌극이라는 동양의 소동 위에, 가장 미국적인 문화의 상징인 재즈가 흐르는 것이죠. 이 이질적인 조합의 아이러니는 이 모든 혼란이 결국 미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에 불과함을 청각적 감각으로 더합니다.
시스템의 붕괴와 리더십의 부재라는 영화의 주제 때문에 많은 관객이 애덤 맥케이 감독의 <돈 룩 업>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이라는 재난 앞에서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고 정쟁과 가십에만 몰두하는 <돈 룩 업>의 인물들은, 인질의 생명보다 권력 다툼에 혈안이 된 <굿뉴스>의 인물들과 겹쳐 보이죠. 두 영화 모두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무엇을 믿고 싶은가’가 더 중요해진 시대의 공포를 웃음과 함께 선사합니다.
이 씁쓸한 결말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것은 납치범들과 서고명의 순수한 열정을 상징하는 만화 <내일의 죠>입니다. 만화의 주인공 ‘야부키 죠’는 마지막 경기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고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명대사와 함께 재가 된 듯한 모습으로 남습니다. 이는 젊은이들을 매료하는 '완전한 연소'와 '후회 없는 삶'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굿뉴스>의 인물들은 누구도 ‘하얗게 불타오르지’ 못합니다. 적군파 청년들의 혁명은 장난감 총과 함께 불발로 끝나고, 영웅이 되기를 꿈꿨던 서고명의 뜨거운 열정은 권력의 게임 속에서 소모되어 빛을 잃게 되죠. 그는 <내일의 죠> 마지막 장면을 두고 주인공이 채색되지 않아 “하얗게 바래 보인다”고 말하는데, 이는 곧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되어 버립니다. 그의 마지막은 영광의 잿더미가 아닌, 모든 색을 잃고 ‘하얗게 바래버린’ 공허함입니다. 영화는 순수한 이상이 기만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소진되고 표백되는지를 '내일의 죠'를 통해 보여줍니다.
<굿뉴스>의 철학은 관객들의 기대가 한껏 모아졌을 때 가장 냉소적인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영화의 시작을 열었던 ‘트루먼 셰이디’의 명언은 결국 아무개의 입을 통해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지죠. 변성현 감독은 영화 시작부터 그럴듯한 명언을 만들어낸 뒤 마지막에 그것이 거짓임을 폭로함으로써 관객에게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을 안겨주고자 했습니다.
순간, 관객들은 '어? 그 명언도 철학자도 가짜였다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실화라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 거야?'라며 모든 걸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모든 형태의 권위를 의심하게 만들려는 작품의 의도가 잘 작동한 겁니다. 영화는 결국 어떤 권위도, 권력도, 심지어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조차도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결국 진실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권력을 가진 주체에 의해 '구성'되고 '선언'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이죠.
이 허탈감 속에서 영화는 새로운 결론에 다다릅니다. “앞면이든 뒷면이든 달은 달이다.” 이는 진실과 거짓, 앞면과 뒷면의 이분법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말해줍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모순적이고 지저분한 총체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지독하게 실용적이고 냉소적인 세계관의 완성이죠.
이렇듯 <굿뉴스>는 냉소적인 사실을 전합니다. 진실은 상품이고, 역사는 각본이며, 권력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것. 영화의 제목이 가진 지독한 아이러니는 위기 상황이 종결된 후 대중에게 발표되는 ‘굿뉴스’가 완벽한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이 소독된 뉴스는 그 과정에 있었던 모든 무능과 권력 투쟁, 부조리를 삭제한 채 권력의 필요에 의해 구성된 서사일 뿐입니다.
영화는 '아무개'라는, 공식 기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기획자를 내세움으로써 역사란 이름 없는 자들의 보이지 않는 공작과 냉소적인 조작을 통해 완성되지만, 최종적으로 보도되는 '굿뉴스'에서는 그 모든 과정이 삭제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권력이 역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서사로 '집필'하는 과정 자체를 폭로하는 거죠.
<굿뉴스>의 성공은 정치적 냉소주의, 관료주의의 무능함, 진실의 조작이라는 영화의 핵심 주제가 지금 이 시대 관객들의 정서와 깊이 공명하기 때문이겠죠. 관객들은 이 지독한 냉소와 유머 속에서 기묘한 위안과 통쾌함을 느낍니다. "권위적인 것들, 관료주의와 계급주의, 이념 대립 등 지겨운 뉴스들에 대한 피로를 냉소로 풀어내고 싶었다"는 변성현 감독의 의도가 관객들에 충분히 전달된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부조리를 스크린 속 희극과 겹쳐 보게 만들고, 그 진실을 인식하면서도 한바탕 웃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질문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과연 누가 그 진실을 구성할 힘을 가졌는가'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더이상 영화 속 '아무개'도, '고명'도 아닌, 스크린 밖 관객의 몫으로 남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