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잠수의 철학
태국 꼬따오의 태양은 뜨거웠고, 바다의 물빛은 비현실적으로 투명했다. 다이빙 강사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물속으로 안내했지만, 내가 '다이빙 강사 과정'을 가르쳤던 그 미국인 중년 여성은 유독 기억에 남는 강사 후보생이었다. 그녀는 물 밖에서도, 물 안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이빙 강사가 되어 자신이 돌보는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아이들에게 바다의 고요함을 선물하고 싶다던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타인을 배려하는 몸짓이 몸에 배어 있었다. 우리는 함께 로그북을 적으며 다이빙의 황홀함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는 나를 신뢰했다. 적어도 팬데믹이 세상을 덮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과정을 마친 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케이브 다이빙을 하러 멕시코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며 발이 묶이고 말았다.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고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던 시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차이나 바이러스"라 부르며 혐오의 방아쇠를 당겼을 때 미 대륙은 아시안을 향한 맹목적인 적개심으로 들끓었다. 나는 멕시코에서 길거리를 다니기 무서울 정도로 생명의 위협과 공포를 느낀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언제나 나에게 친절했던 그 ‘천사 같던’ 그 미국 교육생이 내가 감히 트럼프를 비난한다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맹비난을 쏟아낸 것이다. 그녀는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MAGA)였다. 나에게 그녀는 더 이상 따뜻한 봉사자가 아니라, 혐오에 눈먼 인종차별주의자일 뿐이었다.
이밖에도 해외 바다에서 겪은 모순은 셀 수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 중에는 흠잡을 데 없이 매너 좋은 영국인 친구도 있었다. 고국의 성(Castle) 같은 대저택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얼마나 최고급 교육을 받았는지 은연중에 드러내던 그는, 예전에 한국인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있다며 내게 한국식으로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젠틀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그 우아한 미소 이면에는 기묘한 폭력성이 숨어 있었다. 그는 남성 무리 안에서 게이나 타 인종 친구들을 향해 숨 쉬듯 조롱과 비하가 섞인 혐오 발언을 내뱉곤 했다. 친한 친구들끼리의 '장난'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내 눈에는 결코 농담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폭발한 것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터지고 난 직후였다. 그는 러시아 출신의 여성 동료 강사와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다이빙 센터의 남자 강사들 앞에서 마치 전리품을 자랑하듯 그 사실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러시아 여성과 전쟁을 연결한 기괴한 성적 농담으로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동료들이기도 한 다른 강사들과 어울렸다.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 같은 여성이자 동료로서 나는 그 러시아 여성의 인권과 존엄이 완전히 짓밟히는 듯한 역겨움과 불편함을 느꼈다. 참다못해 내가 불쾌함을 호소하며 그의 무례함을 지적하자, 그는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나를 빤히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래, 페미니스트(Yeah, feminist)!"
그는 여전히 내게 멋진 구석이 있는 친구지만, 그를 온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내 안의 껄끄러움이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불쾌감이 가라앉은 뒤, 섬뜩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ADHD 아이들을 위해 울어주던 미국 여성의 선한 마음과 아시안을 바이러스 취급하던 잔인한 마음, 나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영국인 친구의 세련된 매너와 약자를 향해 내뱉던 저열한 혐오. 이 극단적인 모습들이 ‘한 사람’ 안에 아무런 충돌 없이 공존한다는 사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적나라한 입체성이었다. 하나의 심장 안에서 타인을 향한 지극한 연민과 통제할 수 없는 맹목적 적의가 충돌조차 하지 않고 평화롭게 나란히 숨 쉬고 있다는 것. 나는 그 기괴한 평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도덕적 구획화'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모든 대상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철저히 분리된 심리적 방에 가두어 둔다. 그녀에게 ADHD 아이들은 자신이 연민을 베풀고 보호해야 할 '내집단'이었지만, 국가적 위기와 정치적 선동이 몰아친 상황에서 아시안인 나는 가차 없이 배척해도 되는 '외집단'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그은 선 안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선 밖의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적 공감조차 스위치를 끄듯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면허 효과' 역시 그녀의 행동을 설명한다. 일상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며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진 이들은, 역설적으로 특정 상황에서 타인을 향한 차별이나 맹목적인 혐오를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하기 쉽다. "나는 평소에 이토록 약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선량한 시민이니까, 내 공동체를 위협하는 저 불순물들에게는 가혹해도 괜찮다"는 무서운 자기 합리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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