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해외에서 생활하며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나를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아주 집요하게 괴롭혔던 것은 노골적인 차별보다도 해맑은 얼굴을 한 ‘무지’였다. 서구권 사람들, 특히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I’m from Korea(한국에서 왔어)”라고 소개하면, 열에 일곱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이렇게 묻곤 했다.
“North or South? (북쪽? 남쪽?)”
그 뒤에는 으레 “너 김정은 알아?”, “거기 진짜로 핵폭탄이 있어?” 같은 가벼운 농담들이 뒤따랐다. 그들에게 한국은 <오징어 게임>의 나라이거나,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독재자가 있는 뉴스 속의 가십거리일 뿐이었다. 그들은 지도에서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제대로 찍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그 가벼운 농담 앞에서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그 분단의 역사는 ‘농담’이 아니라 피맺힌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오신 피난민이었다. 지척에 둔 고향 땅을 평생 그리워하셨지만, 결국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다. 5천 년간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던 단일 민족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이권 다툼에 휘말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리가 잘려 나간 지 80년이 넘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나의 핏줄에 흐르는 아픔인데, 그들에게는 그저 농담거리였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들이 한국에 대해, 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이토록 무지한 것은 그들이 지적으로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몰라도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특권” 때문이었다.
나는 종종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까’라는 명분으로 타인의 정체성을 외면하고 자신의 편견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때로는 차가운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폄하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당신이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우리는 흔히 ‘소수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숫자가 적은 집단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거대한 착각이다. 인구 통계에 따르면 여성은 인류의 절반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 피지배 식민지인들의 숫자는 백인 지배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여성은 늘 ‘제2의 성’이었고, 유색인종은 ‘비주류’였다. 즉, ‘정상성’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다수결의 숫자가 아니라, 누가 마이크를 쥐고 있느냐 하는 ‘권력’의 문제다.
이 세상의 표준값은 오랫동안 ‘백인,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산층’으로 설정되어 왔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냥 ‘사람’이다. 하지만 이 범주에서 하나라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여류’ 작가, ‘장애인’ 선수, ‘흑인’ 배우 같은 수식어를 달고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미국 드라마 <홈랜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국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걸 경멸한다.”
이 한 마디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단면을 정확히 관통한다.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재집권을 보며 “미국이 미쳤다”거나 “일시적인 퇴행”이라고 진단하지만, 사실 트럼프는 미국의 ‘이상 증상’이 아니다. 그는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주류의 자리를 뺏긴 적 없는 ‘백인 남성 권력’이, 다양성의 흐름에 위기를 느끼고 본색을 드러낸 가장 정직한 ‘결과값’이다. 미국은 원래 그런 나라였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화나 체제를 ‘악’으로 규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폭격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패권을 유지해 온 나라다.
넷플릭스 드라마 <모>는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블랙코미디로 신랄하게 꼬집는다. 주인공 ‘모’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난민으로,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시민권도 영주권도 없는 ‘무국적자’ 신세다. 미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깊숙이 개입해 난민을 양산했지만, 모가 매일 만나고 부딪히는 미국인 대부분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차이조차 모른다. 또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피해자인 모가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자 미국은 그의 난민 서류 절차를 20년째 끈다. 미국은 급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모는 서류에 등록되지 않은 유령 같은 사람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미국은 그에게 “너의 고통을 서류로 증명하라”며 괴롭힌다.
드라마 속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모가 마트에서 ‘초콜릿 후무스’를 보고 분노하는 씬이다. 후무스는 중동의 전통 음식이자 그들의 영혼이다. 미국인들은 팔레스타인의 복잡하고 피맺힌 역사에 대해서는 “It’s too complicated(너무 복잡해)”라며 고개를 돌리면서, 정작 그들의 문화인 후무스는 입맛에 맞게 초콜릿을 섞어 달콤한 상품으로 소비한다. 알맹이인 고통은 버리고 껍데기인 취향만 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자를 대하는 기득권의 전형적인 ‘기만적 무지’다.
여기까지 쓰고 나면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서구의 백인 남성들을 비판하는 ‘깨어있는 지식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가해자인 적도 많다. 아니, 스스로 ‘열려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더 교묘한 가해자였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기자와 에디터로 일하며 각종 서브컬처와 인디 영화, 음악을 취재했다. 퀴어 영화를 보고,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며 나는 내가 편견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해외 생활을 하며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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