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불안의 다른 이름, 자유

by 조하나


이시가키의 아침은 지난밤 섬 전체를 짓누르던 무겁고 끈적했던 습기를 모조리 거두어간 듯 보송하고 투명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밀려오는 해풍에는 더 이상 눅눅한 비릿함이나 애잔한 달큰함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낡은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는 고르고 평온한 숨을 내쉬며 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맨몸 위로 얇은 셔츠 하나만 대충 걸친 채 사뿐히 걸음을 옮겨 창가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이시가키의 코발트빛 바다가 갓 태어난 아침 햇살을 받아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처럼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지구의 70퍼센트를 덮고 있는 거대한 하나의 물웅덩이. 하지만 꼬따오의 바다와 이시가키의 바다는 그 푸름의 결이 달랐다. 바다의 색과 온도가 다르니 그 바다에 밥줄을 대고 호흡을 섞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의 빛깔도 달랐다.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타인의 상처를 다정하게 품어주던 꼬따오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달리 이시가키의 바다는 짙고, 무겁고, 어딘가 배타적인 묵직한 코발트블루였다. 그 차갑고 묵직한 바다는 함부로 곁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부력을 맞추고 고독하게 버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이 낯선 섬의 심연을 철저히 외롭게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느 바다의 빛깔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색의 물결을 갈구하는지 선명하게 깨달았다.


폐부 깊숙이 이시가키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등줄기를 타고 기분 좋은 상쾌함이 번졌다. 완벽한 주권을 되찾은 자의 아침은 깃털처럼 가볍고 명징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남자 곁에서 끊임없이 관계의 이름을 지으려 하고, 보이지 않는 닻을 내리려 안간힘을 쓰던 어제의 비루한 그녀는 이 낡은 스튜디오의 밤공기 속으로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원두를 가는 투박한 마찰음에 벤이 천천히 푸른 눈을 떴다. 그녀는 스토브 위에 모카포트를 올려두고 다정히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벤이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잠에서 덜 깬 벤의 나른한 얼굴 위로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나, 꼬따오로 돌아가려고.”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막 끓어오르기 시작한 모카포트의 커피 향처럼 담백하고 깔끔했다.


벤은 놀라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맑아진 눈동자를 응시했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순간 눈물을 글썽이며 질척이거나 ‘나를 잊지 않을 거지?’라는 확인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기,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동등한 두 명의 다이버가 물 밖으로 나오기 전 수면 아래서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며 나누는, 깊고 묵직한 연대감뿐이었다.


그의 입가에 티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 어떤 소유욕이나 미련도 묻어있지 않은 완벽하게 투명한 미소였다.

“너의 섬으로 다시 돌아가는구나. 훌륭한 항해가 될 거야.”


아름다운 작별 인사였다. 벤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이마를 맞대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류장에 영원히 정박하는 배는 없다. 그들은 각자의 궤도를 향해 미련 없이 닻을 올릴 준비가 된 완벽한 이방인들이었다.


스튜디오를 나선 그녀는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다이빙 장비 롤백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등에는 낡고 불룩한 배낭을 짊어졌다. 롤백의 바퀴가 이시가키의 아스팔트 위를 구르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어깨와 팔목을 짓누르는 이 수십 킬로그램의 짐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녀 스스로 바다에 기대어 살아오며 만든 정직한 생존의 무게였다. 그녀의 영혼은 한없이 가벼워졌지만, 현실의 두 발은 그 묵직한 짐의 무게 덕분에 땅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 그녀는 굳이 누군가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남겨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코리안, 낫 재패니즈’를 읊조리며 묘한 선을 긋던 낡은 국수 가게 노인에게도, 같은 바다에 뛰어들면서도 끝내 배타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밀어내던 일본인 다이버들에게도, 심지어 이 섬 곳곳에 배어있는 풍경들에게도 그녀는 인사를 건네지 않기로 했다. 냉소나 오만함이 아니었다. 바닷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육지에서의 시간보다 길어지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거리를 통제하는 법을 터득했다.


수심 30미터 아래의 바다에서는 부유물이나 제한된 빛으로 불과 몇 미터 앞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시야가 흐려져 눈앞에 짙은 푸른색 장막이 쳐진다고 해서 저 너머에 거대한 산호초와 고래상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압도적인 믿음이 그녀에겐 생겨났다. 교과서의 활자나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로 배운 지식이 아니었다. 수압을 견디며 스스로 물의 흐름을 읽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생명체의 파동을 피부로 직접 감각하며 몸에 새긴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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