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추천하는 한국 노래 V.1

한 편의 단편 소설을 부르다

by 조하나


학창 시절, 내 카세트플레이어 속에는 늘 미국 팝송과 브리티시 록 밴드의 음악이 맴돌고 있었다. 낡은 영한사전을 뒤적이며 머라이어 캐리, 라디오헤드와 오아시스의 가사를 노트에 빼곡히 적어 내려가던 밤들. 내가 영어를 배운 방식은 문법책의 딱딱한 예문이 아니라, 멜로디에 실려 가슴에 박히는 아티스트들의 시적인 노랫말이었다. 단어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해도, 그들의 언어를 흥얼거리며 나는 자연스럽게 영미권의 문화와 당대의 정서를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었다.


이후 10년이라는 오랜 시간, 해외에서 생활하며 외국인과 생활했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내 일상은 한국어보다 영어로 채워지고 있었다. 밤이면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와 한국어로 글을 쓰고 노래했다. 모국어의 안온함이 간절해질 때면 익숙한 옛 가요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헛헛함을 달래곤 했다. 내가 쓰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언어를 내가 너무 소외시키고 외면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어는 놀라운 언어다. 내가 한국어로 쓴 똑같은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면 분량이 훨씬 많아진다. 그만큼 한국어는 효율적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들을 가지고 있다. '노랗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처럼 미묘한 감각의 차이를 짚어내고, 굳이 주어를 내세우지 않아도 맥락과 온기로 얽히는 문장들 속에는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한국어와 멀어지는 일상을 이어갈수록 한국어와 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정식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취득하고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학사 학위를 하나 더 얻었다.


세월이 흘러, 요즘은 영상이나 글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혹은 이미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은 K-팝이나 K-드라마/영화를 통해 가사나 대사의 의미를 찾고 그 안에 담긴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언어를 배우는 가장 아름답고 빠른 길은 그 언어로 쓰인 노래 가사와 멜로디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문맥 속에 숨겨진 미묘한 뉘앙스를 리듬과 함께 통째로 몸에 새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발라드는 그 자체로 훌륭한 '단편 소설'이다.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 삐삐(무선호출기)와 공중전화로 소통하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날로그 시대의 풍경. 세밀한 감정선을 스케치하듯 뚜렷한 기승전결로 담아낸 이 시절의 노래들은 한국어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정서를 배우기에 완벽한 교재가 된다. 무엇보다 '정'이나 '애틋함'처럼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은 마음의 결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한국인들에게는 짙은 향수를, 외국인 친구들에게는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알려줄 여섯 곡의 단편 소설 같은 노래들을 소개한다.








1. 이문세 - 소녀 (Little Girl, 1985)


1980년대 중후반은 한국 대중음악에 '서정성'이라는 아름다운 색채가 본격적으로 입혀진 시기다.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고(故) 이영훈 콤비는 한 편의 시와 같은 노랫말들로 한국 팝 발라드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1985년에 발표된 '소녀'는 누군가를 향한 애틋하고 순수한 마음을 억지스러운 기교 없이, 마치 맑은 수채화처럼 투명한 언어로 그려낸 명곡이다. 화려한 전자음 대신 따뜻한 어쿠스틱 선율 위에 얹혀진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스마트폰은커녕 삐삐조차 흔하지 않던 그 시절, 해 질 녘 창가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만히 귀 기울이던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이 곡은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어 특유의 서정적인 단어와 '그리움'의 정서를 처음 접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텍스트다. 영어의 'missing'이나 'longing'만으로는 온전히 번역하기 힘든,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한국어 '그리움'의 뉘앙스가 가사 전반에 짙게 배어 있다. 복잡한 은유를 쓰는 대신 '노을 진 창가', '떠가는 구름', '차가운 바람'처럼 직관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시어들을 사용한 점도 돋보인다. 덕분에 한국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습자들도 머릿속에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며, 조건 없이 상대를 묵묵히 지켜주겠다는 한국적인 순애보의 감정을 쉽게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Stay only by my side, you must not leave)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Leaving longing behind, on a far away path)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You cannot come finding the rainbow)


노을 진 창가에 앉아 (Sitting by the window tinged with sunset)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면 (Looking at the clouds floating far away)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I draw the old memories I want to find in the sky)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Mmm, in the cold blowing wind)


그대 외로워 울지만 (You may be lonely and cry, but)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I will always stay by your side)


떠나지 않아요 (I will not leave)







2. 윤종신 - 오래전 그날 (That Day Long Ago, 1993)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떻게 어른이 되어갔을까? 윤종신의 노래는 늘 일상의 평범한 단어들로 미묘한 감정의 파동을 엮어내는 스토리텔링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곡은 학창 시절의 풋풋한 첫사랑을 지나, 군 복무 중의 이별, 그리고 어른이 되어 우연히 옛 연인을 마주친 화자의 복잡한 심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벽한 기승전결로 담아냈다.


특히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 노래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제대(discharge from the military)'다. 한국의 모든 건장한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다녀와야 하는 군대. 그 길고 단절된 시간 속에서 겪게 되는 연인과의 이별은 한국인들에게 아주 보편적이고 애틋한 문화적 코드다. 시간이 흘러 각자의 곁에 다른 사람을 둔 채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이 가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아련한 청춘 영화를 본 듯한 짙은 여운에 빠지게 된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 (Taking off my school uniform, you whom I first met)


그때가 너도 가끔 생각나니 (Do you also sometimes think of those days?)


뭐가 그렇게도 좋았었는지 (What made us so happy?)


우리들만 있으면 (Whenever it was just the two of us)


너의 집 데려다주던 길을 걸으며 (Walking on the path I used to take to walk you home)


수줍게 나눴던 많은 꿈 (The many dreams we shared shyly)


너를 지켜주겠다던 다짐 속에 (Within my promise to protect you)


그렇게 몇 해는 지나 (Like that, a few years passed)


너의 새 남자친구 얘길 들었지 (I heard the news of your new boyfriend)


나 제대하기 얼마 전 (Shortly before I was discharged from the military)


이해했던 만큼 미움도 커졌었지만 (As much as I understood, the resentment also grew, but)


오늘 난 감사드렸어 (Today, I gave thanks)


몇 해지나 얼핏 너를 봤을 때 (When I caught a glimpse of you after a few years)


누군가 널 그처럼 아름답게 지켜주고 있었음을 (That someone was protecting you so beautifully like that)


그리고 지금 내 곁엔 (And now, by my side)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조하나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나를 위해 쓴 문장이 당신에게 가 닿기를|출간작가, 피처에디터, 문화탐험가, 그리고 국제 스쿠버다이빙 트레이너

2,852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3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7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