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튼 아카데미>
<바튼 아카데미>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감독하고, 데이비드 헤밍슨이 각본을 쓴 미국 크리스마스 코미디 드라마 영화입니다. 영화가 공개되던 해 수많은 영화 시상식에 이름을 올렸고, 배우들은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받았죠.
페인 감독은 <어바웃 슈미트> <사이드웨이> <디센던트>를 비롯해 최신작 <바튼 아카데미>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를 석권한 거장입니다. 현대 미국 사회를 풍자하고 묘사하는데 정평이 난 감독이죠. 그런 그가 처음으로 70년대 시대극을 선보였습니다.
<바튼 아카데미>는 1970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연휴, 뉴잉글랜드 기숙학교에서 외롭게 난파된 세 사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그립니다. 빛나는 연기 경력의 폴 지어마티가 학생과 교직원 모두에게 미움받는 시력 장애를 가진 까칠한 고대사 겸임 교수 ‘폴’을 연기하고, 신예 배우 도미닉 세사가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사고뭉치지만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 ‘앵거스’로 분합니다. 이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식당 매니저 ‘메리’는 베트남전에서 외아들을 잃고 역시 텅 빈 학교에 남겨지죠. 이들에게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사건과 모험을 영화는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합니다.
“<사이드웨이> 이후 페인 감독의 최고의 작품”이라 호평받은 이번 영화는 고집 세고 괴짜스런 비호감의 사립학교 교수로 분한 폴 지어마티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폴과 페인은 <사이드웨이> 이후 이 영화를 통해 재회했죠.) 영화부터 TV시리즈, 연극까지 워낙 다작을 했고 <빌리어네어>로 한국에 잘 알려진 폴 지어마티의 연기는 정말 훌륭합니다.
크리스마스 영화답게 소복이 쌓인 눈을 배경으로 아카펠라 학교 합창단의 캐럴이 흘러나오지만, 이 멜랑콜리한 유머의 표면 아래에는 따끔한 떫은맛이 감도는 우울함과 따뜻한 감상에 상쇄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있습니다.
단지 ‘운이 좋아’ 권력과 부를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난 금수저들을 평생 가르쳐 온 폴은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울분을 차라리 ‘괴짜 선생’이라는 성향 속에 묻어버립니다. 홀로 어렵게 키운 똑똑하고 장래 유망한 아들 커티스를 베트남전에서 허망하게 잃은 유색인종 ‘메리’를 통해 영화는 후대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징병제였고, 인종과 계급에 따라 그 징병제를 회피할 수 있는 불공정한 방법의 중심에 ‘교육’이 있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금수저 출신 백인 아이들은 실력과 상관없이 고등학교 성적을 높게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해 입대를 피했으니까요. 2024년의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197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폴은 금수저 백인 아이들에게 혹독한 피드백과 양심 어린 점수를 고집합니다. 사립학교에 거액을 기부하는 부모들의 눈치를 보느라 교장 선생님은 애가 탑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대충 좀 하지, 눈치 좀 보지. 하지만 폴이 학교에서 비호감인 건 꼭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은 시인의 사회>의 교사를 떠올리면 안 됩니다. 영화는 담담하고 성실하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폴과 앵거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는 <바튼 아카데미>를 보석 같은 영화로 만듭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과 천천히 자라난 둘 사이의 거대한 유대감은 느리고 자연스러워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죠. 폴과 앵거스, 메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세 사람이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때론 낯선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으로 서로를 이끌 수 있고,
우리가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자신할 때, 혹은 삶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한 지 한참 후에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론 절망과 슬픔으로, 때론 놀라움과 사랑으로 가득하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혹독한 겨울에도 따뜻한 봄은 올 수 있다고,
아무리 진부하고 느끼한 이야기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이죠.
저 역시 제 삶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툭하면 싸우던 부모님을 피해 도망친 교회에서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저를 따뜻하게 안아준 전도사 선생님, 지금까지 나쁜 짓 않고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기본을 잘 다질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 나에게 좋은 경험과 교훈, 위로가 되어 주었던 삶의 곳곳에서 만난 친구들. 모두 뜻하지 않은 때에 예상치 못한 삶의 커브에서 나타나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새로운 가족, 그리고 느슨한 연대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할리우드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튼 아카데미>의 메시지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이런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느껴진 지 너무 오래된 냉소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세상, 저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상처를 보려고 들여다보지 않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죠. 영화는 메시지의 진부함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안에 시대를 초월하는 진실을 담아냈습니다.
요즘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누군가 말하더군요.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닿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닿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요.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해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을 용감하게 마주하는 경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고요. 우리에겐 모두 새로운 꿈을 꿀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폴과 앵거스, 메리가 ‘체리 주빌레’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따뜻한 아날로그 필름 사진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자주 꺼내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