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치매인가 집중력이 높아진 것인가?
한동안 나 자신과 심하게 싸우며 어찌보면 강박스럽게 나를 혹사시켜야만 했던 일이 하나 있다.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되는데 어찌보면 쓸데없는 오기를 부렸던 바로 그 사건. 마치 과거의 내 기억력과 지금의 기억력의 수준차이가 발생한 것을 시험해보고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사건.
[사건발생]
『 예비용 휴지가 바닥이 났다. 현재 걸려있는 휴지도 반 정도는 썼다. 어서 공급해야한다.』
[관련지식]
(1) 나는 휴지를 현관 중문 바로앞 펜트리(수납장)에 보관한다.
(2) 나는 욕실에 사용중인 휴지외에 예비용휴지 2개를 추가로 보관한다.
(3) 내가 주로 사용하는 욕실은 복도를 지나 집안 깊숙히 있는 안방에 있다.
(4)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빨리 하고 쉬려고) 무척이나 안달난 사람이다.
[결론]
욕실 휴지를 보급하는 최적의 루트는 퇴근하면서 팬트리에 들러 휴지를 꺼내 가져오는 것이다. 퇴근 후 출입을 거의 하지않는 복도구역에 굳이 가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
휴지보급과 혈투를 벌였던 시기에 욕실에서 일을 볼때마다 나의 머릿속에서 발생하던 사고의 흐름이다. 헌데 한두번으로 끝났어야할 이 과정들이 생각보다 많이 반복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아 맞다! 내일은 꼭 시도해야지!' 를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는지 모른다.
휴지는 점점 떨어져가고 이러다 큰 사고(?)가 나면 대체 어쩌려고 이러나 싶다가도 퇴근 후에는 절대 내 몸은 복도를 지나 현관중문 옆에 있는 팬트리 쪽으로 가지 않았다. 퇴근은 평일 항상 하는거니까 '내일하면 되겠지?'하면서 계속 미루게 되더라. 그리고 그 한 켠에는 이런 생각도 분명히 있었다.
'설마 내일도 또 까먹을까?"
응.. 내일도 또 까먹더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그 다다다음날도...
아니 그냥 한번 현관 앞까지 한번 다녀오면 될거를 대체 언제까지 까먹을 건지 싶어서 오기가 발동했다. 이게 반복되고 나니 내가 스스로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진심 퇴화된 것인지, 그 바닥의 끝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버렸다.
무엇보다 이런일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 오기를 부리는 내내 탐구했던 결과 얻어낸 내 결론은,
"나는 변했구나. 이제 나는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다." 였다.
멀티플레이어는 내 자랑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따라와줘야 하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나는 욕심이 많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헌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한정적이다! 그런 나에게 이 '멀티플레이어'의 개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어릴적부터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절대 책이든 뭐든 볼 것 없이는 간식을 먹지 않았다. 머리를 말리면서 동시에 옷을 입고, 등교를 하는 지하철에서 한문숙제를 하기 위해 일부러 미리 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토익공부를 해야하는 시기에는 변기에 앉아있을때마다 영어로 뭔가 계속 지껄이고 미드를 보며 밥을 먹는게 좋았다. 운전할때는 꼭 음악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날때는 한꺼번에 만나는 것이 좋아서, 내 지인들은 서로 잘 알았으면 했다. 그래서 서로에게 소개시켜주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나는 퇴근길에 팬트리에 들러 휴지를 가져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미 안방구역으로 들어온 다음에 다시 중문 근처로 굳이 돌아가는 것은 내 신념에 너무나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내가 멀티플레이어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중이다. 최근 나는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면 나머지 하나는 새카맣게 까먹어 버리는 경우가 잦다. 어린시절에 TV만 보면 엄마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동생을 보며 일부러 저러는 거냐고, 못들은척 하는거냐고 거참 이해가 안간다 했었는데 이제 내가 그러고 있다. 무언가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나면 말이 마무리가 안되고 무슨말을 하고 있었는지 까먹기까지 한다. 분명 정상궤도에 올라와 있던 그에 대한 의식의 흐름은 아직 다 끝난것도 아닌데 중간에 갑자기 끼어든 다른 생각쪽으로 틀어져 버리곤 한다. 말과 생각의 조합 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간지러워서 어딘가를 긁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나는 경우 어디가 간지러웠는지 기억이 안난다던지, 분명 방으로 무언가를 가질러 들어갔는데 미니청소기로 바닥의 머리카락을 줍고는 그냥 나와버린다던지. 적고나니 너무 무서워지네. 그럴싸하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냥 치매초기증상 아님? ㅠ_ㅠ
분명 퇴근한다고 회사를 나서면서,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또 다른 휴지인 곽휴지를 보며, 오늘은 꼭 팬트리에서 휴지를 꺼내야지 생각을 하긴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퇴근길 운전을 하며 만나게 되는 무언가, 저시키는 왜 운전을 저따구로 한담? 이라던지,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분노에 부들부들 한다던지, 이번 주말에는 딸기와 이러이러한걸 해봐야지..와 같은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는 도중에 펜트리의 휴지 생각은 어느새 저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도 생각났던 그것이 그 찰나의 순간에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아파트 공지사항을 읽는 도중 또 바닥으로 떨어져서 현관문을 여는 순간에는 또 새카맣게 까먹어 버린다는 거. 그 때는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크다. 공지사항을 읽었는지 아닌지는 벌써 기억이 안나고, 이제는 내가 아까 나올 때 전체소등버튼을 누르고 나왔던가? 현관바닥청소 해야되는거 아닌가? 와 같은 생각과 씨름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근데 말이다. 이걸 되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뒤집어 보면 '참 집중력이 높아졌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이번 글의 요지이다. 뭐 자의는 아니었지만 요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그렇다. 집중력이 얼마나 강해졌길래 그 외의 다른 것들은 그렇게 아웃오브안중이 될 수 있는지. 역으로 이용하면, 내가 잘 컨트롤만 할 수 있으면 활용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원래 나이를 먹으면 젊을때보다 시간이 빨리간다고 느껴진다고는 하지만, 요새 진짜 그렇다. 뭔가에 집중하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버리고 그 체감의 정도는 예전에 멀티를 즐길때와는 현저히 다르게 다가온다. 물론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하면 원래 할 수 있는 시간에 무한대로 추가 시간이 들어가겠지만. 앞에 얘기했듯이, 다른 생각에 빠져들면 원래 하던 생각이 메인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의식에서 사라져버리니까.
어떻게든 발버둥 쳤던 것들은 이제 뒤로하고, 받아들일 시간이다. 이제 멀티를 즐기는 것보다 강화된 집중력을 활용하자. 그리고 잊고 싶은 생각들은 재빨리 망각의 궤도에 올리는 연습도 해보자.
그래도 하고 싶다면 조금 머리를 써보자. 휴지가져오기 미션을 클리어 하고 싶다면 오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인출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는 건 어때? 중문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다던가? 아니면 휴대폰 알람? 아 뭐야... 이런거 할 시간에 그냥 꺼내 오면 되겠다. 이건 좀 아닌것 같고... 아! 출근할 때 펜트리 문을 열어두는 건 어때? 퇴근할 때 그거보면 생각이 나지 않을까? 이건 너의 신념에도 벗어나는 일이 아니다. 출근길 동선과 완벽하게 일치할테니 말이다. 물론.. 출근할 때 까먹으면 말짱꽝이 되기야 하겠지만..
사실 이 글은 7월에 적다가 어느 순간 흐름을 놓쳐서 작가의 서랍에 그냥 내버려두고 잊어버렸었고(그림까지 그리며 생쇼를 했지만 원래 나란사람이 그렇다...) 10월의 끝자락인 오늘, 휴지가 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고나니 또 생각이 나서 급하게 마무리(....는 개뿔 반이상 다시쓰는....)중이다. 사실.. 7월에는 어찌 해결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딸기가 대신 가져다 줬던가??
그리고튼 지금은 10월이고 다시 휴지3개를 보급해야 할 시기가 왔다.
응.. .그래... 뭐 예상하겠지만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 출근할 때 펜트리 문을 열고 오지 않았다.
오늘 나는 어쩌면 이 글을 적으며 심하게 온 현타로 인해,
휴지전체 패키지를 욕실 옆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옮길지도 모른다...
물론... 장담은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