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싯고 나왔는데 오른쪽 약지손가락이 너무 쓰라렸다. 이게 왜 이럴까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침의 일이 생각난다. 그날 출근길에 옷을 입다가 실이 한가닥 나와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하나에 실을 감아서 한순간에 강하게 확 잡아 뜯었다. 늘 그렇듯이 잘 뜯겨져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꽤 굵었던 모양인지 실은 끊어지지 않았고 대신 오른쪽 약지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당황했던 것이 먼저였고 어찌할까 하다가 피는 보이지 않아서 괜찮겠거니, 오늘이 지나면 낫겠지 하고 그냥 출근을 했었다. 하지만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는 동안 낮동안 괜찮았던 상처가 물을 만나 퉁퉁 불어서 벌어졌던 모양이다. 사실 애초에 그 상처는 종이에 벤 것과 어찌보면 유사한 상태. 다만 실의 굵기만큼 더 굵고 더 깊은 상처가 생겼었던 거지.
원래 약 바르는것도 귀찮아하고 특히나 밴드를 붙이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았던 나란 사람. 어릴적 엄마의 가르침 그대로, "공기가 통해야 상처가 더 잘 낫는거야"를 실천하던 나였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낫기 전까지 한손으로 싯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온 집안을 뒤져 마데카솔과 밴드를 찾아냈다. 그리고 처치를 했다.
요즘 새벽 6시에 테니스 레슨을 받는다. 5시25분 알람소리에 일어나 5분 정도 딩굴딩굴하다가 늦었다! 하면서 벌떡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편한 옷을 입고 5시 45분쯤 나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 6시 전에 테니스장에 도착한다. 공 줍는 시간까지 30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은 이른 시간이다. 그래서 이렇게 몇 글자 적을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오늘 라켓을 휘두르는 도중에도 나는 여전히 오른쪽 약지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사실 나가기 전에 그냥 떼고 갈까도 생각했었는데 왠지 떼보기가 무서워서 잠시 미뤘다. 그리고 돌아와서 손가락이 걱정되는.... 초극강의 난이도인 머리감기와 샤워를 동시에 진행하기에 앞서 다시 망설여졌다. 이걸 떼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결국 밴드가 붙여진 상태로 싯어버리면 습기가 차서 피부가 더 잘 불어터지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승리하여 떼버렸다.
근데.. 뭐지? 상처의 흔적이 없다? 내가 잘못 붙인건가? 이건 생각외의 효과인데. 쓰라린 욕실에서의 한마당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겁나 빠른 회복력 덕분에 예상과는 달리 통증없이 무사히 싯었고 그러는 내내 생각했던 것들을 쏟아내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다.
최근 몇달간 나는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견뎌야만 했다.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릴때는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자주 겪었었다. 그렇게 틀어진 환경을 지나 이제는 조금은 정상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기에, 약간은 성격이 다른 물리적인 상처의 회복에도 이렇게 큰 감동을 했나보다 싶다.
사실 내가 그 힘든 시간을 그저 시계만 바라보고 인내해냈으면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알기에.. 예전 같으면 그냥 자버리면 다 까먹는 무심한 아이였겠지만 언젠가부터 감성지수만 겁나 높아져버린 예민한 아이가 된 이후로는 그런 시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마침 회사에서 진행하는, 직무스트레스를 해결을 위한 'EAP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상담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내 문제가 뭔지 파악했고, 테니스를 시작했고, 집중할만한 무엇가들을 찾았다. 갑자기 빔프로젝터에 꽂혀서 집에 어떻게 설치할까를 고민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신경쓰이고 걱정되던 외부요인들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회사앞 천원짜리 자동세차장이 없어져서 걱정하면서 반년을 보냈는데 결국 찾아낸 출장세차 서비스는 너무 맘에 든다. 아직 처리하지 못하고 널부러져있는 겨울패딩들과 운동화는 오늘은 꼭 세탁소에 전화해서 픽업을 부탁할 예정이다. 뭐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엄하게 현실도피를 위한 게임에 빠져 잠도 안자고 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했었으니까. 지금은 다행히 없애버리고 이른새벽의 테니스 레슨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사실 오늘 회사에 가면 또 어떤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나도 모른다. 징크스 같은건데 꼭 이렇게 상콤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아! 나는 행복해!"하고나면 이상한 일이 터지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상처가 생겨도 재생이 가능한 사람이다. 상처가 생겼을땐 그 상황에 맞는 마데카솔과 밴드가 무엇인지 찾아만내면 되는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