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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나씨 Jun 01. 2023

내가 그때 그렇게 살았던 이유

H성인상담4기 트라우마 치료와 기법 수업 중

우리는 괴로운 상황에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을 본능적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생존자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인내하고 대처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어린시절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생존자원을 계발.........몸을 마비시키거나 활력을 얻기 위해 약물을 남용하는 것...........각성을 조절하거나 감정을 억압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자원으로 발달하게 된다.  
(감각운동 심리치료 by PAT OGDEN & JANINA FISHER)



예전에... 아마도 201X년경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팀장님이 얼른 결과물을 가지고 오고 재촉하는데도, '업무를 가져가면 당최 결과물을 내어놓지 않는다고. 그냥 다 흡수해버리는거 보니, 혹시"블랙홀"이냐며' 웃으며 돌려 까주시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화를 절대 내지 않는 팀장님이 자기 자리에서 몰래 한숨을 쉬는 것을 들어도 모르는 척했다. 이윽고 닥친 정기인사때 다른 부서의 누군가와 바꿔치기를 당할뻔 했다는, 즉 우리팀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도 그다지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회사에 오면 일을 하기보다 구석의 내 자리에 숨어 의미없는 인터넷 쇼핑, 어차피 사도 입지도 못할 것이면서, 엄마의 잔소리가 예상되는 '쓰레기'를 구매하기 위해 사이트를 뒤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 보다는 동기들과의 사내메신저 놀이에 시간을 더 할애 했다. 사실 그런 내가 너무나도 싫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철저히 바른생활을 하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을 가졌던 나였기에, 열심히 살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혼이 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나였기에, 당시의 나 자신이 참으로 견딜 없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뭐 이후에 빠른 승진을 하고 능력을 인정받고 고생한 보상으로 회사에서 보내주는ㅡ1년간 출근이 아닌 등교를 하는 대학원 교육파견도 경쟁을 뚫고 선발되었으니 확실히 부활한것은 맞는듯하다. 다만 어떻게 극복을 하고 어떻게 정신을 차린것인지,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법도 한데.. 사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해결해 준 것도 같고,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기회가 되면 다시 깊게 생각한 뒤에 써볼 생각이다.


나는 우리 회사에 대해 '여기서 받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백수였다.'라며 충성심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주위 환경이 원했던 터라 책임감도 어렸을때부터 엄청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내가 하는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심지어 한번 맘만 먹으면 각잡고 후루룩 해버릴 수 있는 경력이 좀 쌓인 중견사원도 아니었고, 내 일을 후배들에게 삥뽕칠 수 있는 직급도 아닌-그저 입사 3년을 겨우 넘긴 막내였는데... 무슨 깡으로 그렇게 다 놓아버리고 막 나갈 수 있었는지. 그렇기에 당시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나는 상당기간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당시의 내가 미련해서 견딜 수 없었고, 특히 내가 회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팀장님과 같이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좋은 인상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너무 속상하고 나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수업을 거치며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했다. 지금 보니 그때의 나는 분명 삶이 무척이나 힘들었것이다. 나는 괴로웠던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어릴적 부터 가져왔던 '바른아이'라는 핵심적인 신념을 넘어설 정도로 힘들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생존자원에는 셀 수 없는 여러가지가 있다. 동물적인 본능을 발휘하여 주변에 크게 화를 낸다거나 혹은 도움을 갈구하는 절규하는 방법 또는 낮은 각성상태로 시체처럼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방법도 있다. 나의 경우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겠기에. 그나마 살아남는 방법으로, 나름 계발한 생존자원은 책임감을 조금, 아니 많이 놓아버리는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바르지 않았던 내 행동들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나를 살아있게 했던 하나의 수단이었음을, 한편으로는 그렇게 찾아서 라도 살기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이 다행인 것이라고, 이것들을 인정하고 되려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임을.



그간 회사생활은 열심히 해왔지만, 막상 본사, 그것도 당시 화려한 경력들을 자랑하는, 타 부서에 비해 인적구성이 남달랐던 기획조정실에 처음으로 속해있던 그때.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그냥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쓰다보니 진짜 그렇다. 팀장님이 내게 지시하던 일들은 수십년 경력을 가진 과장님의 일이었다. 예산이 부족한 부서에서 예산조정을 요청하면 그것을 심의하여 처리해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일단 전 지사에 깔려있는 얼굴도 모르는 선배님들에게 '예산반영이 불가합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예산 요청건에 대해 심의를 하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오라지시했던 팀장님. 사실 막막했다.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적어서 갈까요? 전임자 파일들을 뒤져봐도 그런 양식은 없어요. 작년에 계시던 팀장님은 본인이 의사결정을 하시고 저는 결재문을 타이핑만 했었는데요.. 제가 직접 심의를 하라뇨.. 감히 이렇게 얕은 지식으로 심의를 해도 되나요? 예산편성에 참여해봤던 것도 아니고, 작년 예산편성때는 제 담당예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옆에서 서무일만 했을 뿐입니다. 차라리 예산 심의는 본인 담당분야만 하면되겠지만 팀장님이 지시하신 이 업무는.... 일부가 아닌 전체 범위의 예산을 알아야 하는데요? 차라리 담당 분야별로 선배님들이 각자 심의해서 저한테 주면 취합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지식으로는 도저히 적을 수가 없어요...그냥 백지만 바라보다가 화면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칭찬만 받고 쑥쑥 자라던 신입사원은, 나름 인정은 받았던 것인지 1년 반만에 수시전보로 지역본부에서 기획조정실로 갑자기 끌려온, 그래서 자신감이 흘러넘치던 막내사원은 매일매일이 막막해서 숨이 막혀왔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 전임자는 내가 전보오기 직전에 명예퇴직을 하셔서 얼굴도 못 봤는데 어디에 물어봐야 할까? 다른 선배님들은 각자의 일에 너무 바빠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도 하나 발현되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주변에 언니오빠가 없었고, 다른아이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던, 숙제를 위한 바이블인 'ㅇㅇ전과'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했다. 숙제에 답을 적어 어찌어찌 완성했지만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는... 그 속이 타들어갈 듯한 불안감에 늘 시달리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때 매주 주말과제가 있었다. 나는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별자리는?" 이라는 쉬운 질문에,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백조자리'를 적은 것이 아니라, '남십자성, 물뱀자리' 를 적었다.  나는 당시 집에 있던 백과사전을 좋아했다. 전과가 없어서 그나마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참고서였다. 뭔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겹치는 내용이 백과사전에 있으면 너무나 기뻤고 나중에 혹시 참고가 될만 한 페이지에는 따로 표시를 해두었었다. 나는 거기에서 찾아낸,  '우리나라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일부만 보이는 별자리'에 속해있던 것들을 아주 당연하게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답으로 적어서 냈다. 즉 완전 반대방향으로 생각했었다는 이야기.  잘못된 답인지도 모르고 그저 ㅇㅇ전과만 보고 숙제를 한 아이들이 적지 못했을, 고차원의 답변을 했을테니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제출했던 숙제를 돌려 받았을때 선명하게 그어진, 틀림의 표시인 붉은색 사선, 그리고 그 옆에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이라고 적힌 멘트.. 아직도 기억속에서 생생하다.. 붉은색들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쪽팔리다는 서둘러 숙제를 안 보이게 치워버렸다.

어린시절의 이 경험이 발전시킨  불안감. 내가 페이퍼를 채워가도 정답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에, 상황을 피해버리는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다른 여러가지 힘든 요소들도 있었다. 이제 지방이 아닌 서울로 발령받아 왔으니 순탄할 것이라 예상했던 연애사업도 엉망진창이었다. 길었던 연애는 쌍방의 내적인 유로, 혹은 외적인 유로 숱한 이별과 재만남을 반복하다보니 안정감을 못했. 새로 만난 사람들도 어디서 이렇게 하나같이 겁나 완벽하신 인간들만 나타나는 것인지... 후... 나의 30대 초반의 연애는 힘든 기억이 대부분이다. 지역본부 시절 엄청나게 늘어난 뒤 좀처럼 줄어들지 않던 내 몸무게도 한 몫을 했었겠지. 옷을 사러가도 맞지가 않아 애초에 오프라인에서 옷을 살 생각도 못했던 그때, 그런 나를 좋아해줄 사람은 흔치 않았다. 집도 마찬가지. 지역본부 시절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 엄마의 수하로 들어온 이상 잔소리는 피할 수 없는 상황. 특히 유난히 나에게 엄격했던 그녀의 나에 대한 크고 작은 잔소리들은 내가 어릴때는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서른을 넘긴  시점에서는 허용범위를 진즉 초과한 상태였다.




정말이지 회사고 연애고 집이고.. 당시의 내 상황을 비집고 들어가서 생각해보니 뭐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었을 때이다. 적응하는 것이 먼저였던 험악했던 본사 생활, 모든 생활을 공유하던 남자친구가 없는 삶, 편안하게 쉴 수 없었던 집안 분위기는 내게 모두 힘듬의 요소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표현해왔던 표현, "나를 망각할 있는 무언가...'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었어야 했는데 그럴 것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루틴한 생활 속에서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 어찌보면 무언가에 홀린 듯 본능적으로 찾아냈던 것이다.



물론 본인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사회적으로 크게 통용이 되는 범위를 벗어나서, 예를 들어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남들에게 큰 피해를 준다거나 하는 것들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허용가능한 일탈은 가끔은 용서해주기로 하자. 살기 위 몸부림을 그저 기존과 다른 삶을 산다고 해서 옳지 않은 길이라며 탓할 것만이 아니라 '내가 요새 좀 이상하다'는 인식, 그리고 그것들을 '그냥' 하게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극복하는 중이다'라고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일단은 그냥 이해해주자. 당장 내가 살기 위해 자연스럽게 택하고 있는 방법이니 받아들이자. 혹시 그 이유를 찾았거든, 바로 해결할지 혹은 일단 놔둘지는 본인의 몫이다. 어차피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지도 않으니 어떤 방법을 쓰던지 괜찮다. 이유를 찾지 못해도 괜찮다. 그냥 나를 믿자. 일단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 안정을 찾고 나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몇 년이 지난 후에라도 꺼내서 이해하면 된다. 급하지 않다. 일단은 내가 우선이다. 힘들다는 외침 자체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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