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렇게 편지로 너와 대화를 시작하는 것 부터 힘들었지. 정말 오래 기다렸어. 대체 언제쯤 나를 불러줄까 하고. 솔직히 또 네가 언제든지 대화를 멈추고 갑자기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쏟을 것이 예상되어 마무리는 언제 될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단 시작을 했다는 데에서 일단은 성공이라 얘기해 두기로 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인터넷 탭을 추가해서 또 다른 무언가를 찾거나 사거나 하는 욕망을 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져. 대체 이런 너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일단 요즘의 네 행동패턴에 대해 얘기해보자.
요새 너의 하루는 회사, 그리고 집.. 물론 중간에 이벤트가 생길때마다 집 밖으로 나가기는 하지만 그럴때마다 너무 귀찮고 싫지? 일단 나가면 어떨지 몰라도 일단 나가기 위한 준비, 그리고 나가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것이 느껴져. 현재 상태 그래도 있고 싶어하는... 즉 관성이 유지되었으면 하는데 그것을 깰 에너지가 부족한거지..
기억한다. 너의 일상이 이런식으로 고정되어 버린 것은 인식이 가능한 분명 짧은 시일 내야. 너는 3월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몇개월간은 그래도 집을 정리하고 또 꾸민다고 움직이기는 했어. 그게 시간이 갈 수록 말로만 계획을 짜고 몸은 점점 움직이지 않아 결국 신랑이 아바타처럼 움직이며 마무리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뭐 그래도 지금보다는 무언가를 했어. 그리고 정리가 대충 마무리 된 시점은 강한 리액션으로 집안을 들어다놨다 했던 그 후배들이 다녀간 6월 초야. 물론 집은 지금도 꾸미는 것이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목표를 달성한 느낌이 들어 그 이후로는 뭔가 새로 하지는 않았고, 원래 하려고 했던 것들도 그냥 손을 놓아버리는 것 처럼 보인지 오래야.
그럼 다시 관성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퇴근 후 여유시간을 예전에 비해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는 지금. 그 시간을 지금 너는 게...임...으로 채우고 있어. 하지만 단편적으로 네가 게임중독임이라며 '이것을 고쳐야 한다', '이것을 끊어야 한다'는 1차원적인 조언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생각하는게 아니라 진짜야.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너는 게임중독이 아니야. 지금 너는 게임이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중독이라고 하면 연초까지 빠져있던 대항해시대 오리진 정도는 되어야지. 회사를 빼먹고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퇴근 후 게임하는 시간이 너무 기대가 되고, '잘'하고 싶어서 틈만나면 게임관련 공략들을 찾아보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게임 캡쳐사진으로 도배가 되는 이 정도는 되어야 비벼볼 수 있지 않겠어? 즉 지금 너는 게임 중독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야. 넌 그냥 쇼파든 침대든 어딘가에 누워있기를 바라고 있고 그냥 멍하게 있는 것은 허전해서, 그냥 누워만 있는 것은 시간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너에게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비어있는 시간을 채우고자 했던 거지. 네가 하고 싶은 것은 게임이 아니라, 그냥 어딘가에 몸을 기대고 가장 편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 게임은 그냥 너 자신에게 조금의 죄책감을 덜거해 주는 소품일 뿐.
그렇게 편하게만 있으려고 하니 의욕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해. 그리고 그 의욕이 사라지니 점점 더 해야하는 일들이 귀찮아지고 하고 싶은 것이 줄어드는 것도 당연해. 그래서 다시 관성이 유지되는거지. 최소한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일부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그렇게 지내기를 원해. 방금 무언가를 먹었어도 상관없지. 소화기관들이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러대도 그때뿐이야. 소화를 시키기 위해 적어도 앉아있는 다거나 일부러 더 움직인다거나 하는 것은 지금의 너에겐 의미없는 일일 뿐이지.
그런 너에게 충격 요법을 하나 주려고 해.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니까 해주는 말이야. 너무 상처는 받지 말고 들어.
우선 "만사 집중력이 떨어지고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지는 것"도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야.
우울증은 그냥 '우울함' 자체만으로 진단을 내리지 않지. 그 우울감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다면 고민해봐야해. 물론 동일 증상이 장기간 이어져야 비로소 우울증으로 진단을 내리지만, 초기 단계에 인접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거야.
또한 최근 회사 후배에게 얻은 배신감으로, 겉으로는 특히 회사에서는 괜찮은 척을 했지만 그게 아니었지. 분명 상처준 것은 그인데 되려 너는 그 귀인을 또 너에게서 찾으려고 했지. 그렇게 단순한 자책이나 죄책감을 넘어선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책감을 느꼈어. 거기에 더해 그렇게 약한 네가, 자신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네가 미워서 견딜수가 없었어. 이것 역시 우울증과 관련된 감정이야.
심지어 신체적인 이상도 경험했었어. 신랑과 같이 있다가 그가 갑자기 운동을 하러 떠나버린 그때. 소파에 엎드려서 누워있었던 너는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의욕저하를 정말 바닥까지 느꼈던 순간이었지.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소파가 젖어가는데 닦을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 그리고 1차로 네 몸과 정신이 분리되고, 2차로 주변의 모든 사물이 분리되기 시작했고, 그러다 현재 엎드려 있던 그 소파도 너에게서 분리되는 것 처럼 느끼며 몸이 붕 떠있는 것 같은 경험을 했잖아. 이런 현상을 '해리'라고 해. 종류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너는 너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혹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자연스럽게 정신과 그 밖의 것을 분리했던 것 같다. 그러다 신랑이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너를 흔드니 차츰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잖아. 비록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외롭다', '혼자두지 말아'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말이야.
너는 사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에게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어. 적용해보니 어떠니? 계속 이렇게 살고 싶은 거니? 처음으로 병원에 가봐야 할 정도로 정말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집 주변의 정신의학과를 검색하며 두려움에 떨었으면서도, 계속해서 네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일에 의욕이 떨어져 위험한 상태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방치했더니 결국 후배의 배신이 계기가 되어 해리까지 경험하는 상태가 되었어. 태어나서 우울증에 가장 가깝게 인접한 지금, 이걸 그냥 놔두는 것이 맞겠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주변에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야. 무조건적인 투정을 부려도 받아주는 이가 옆에 있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같이 눈물흘려주는 이가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야. 하지만 기억해. 그들은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네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거. 결국 네가 변해야 해. 적어도 네가 힘들면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힘들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민폐짓을 극혐하는 너이지 않니? 너의 감정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상황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니?
첫째로 다소 정신이 없을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생각이 날 때 바로 하기로 해. 지금 관성을 가지고 있는,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쿠션을 받치고 핸드폰 게임을 하는 것만 빼고(이건 미뤄도 상관 없음). 업무를 하던 중이어도 상관없어. 갑자기 검색으로 무언가가 궁금하다면 그냥 검색해.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써. 여기서의 키워드는 '당장'이야. 시간이 지나면 또 하기 싫어지잖아. 꼭 '바른생활'을 위한, 예컨데 운동이나 독서 따위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되는거야. 갑자기 쇼파에 누워있다가 설거지가 하고 싶어지면 바로 해버리는 거야. 굳이 설거지와 같이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저기 보이는 휴지 한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이어도 괜찮아.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의욕의 불씨를 살리는 것이 중요해. 이렇게 하다보면 하고 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물론, 좀더 어려운 레벨 도전에 대한 욕구도 다시 살아날거야. 나는 믿고 있어. 너는 조만간 몇 달이 넘도록 안마의자 근처에 놓아둔 투명필름을 대리석 탁자에 예쁘게 붙일 수 있을거야. 정리하다 중단된 팬트리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거야.
두 번째는 모든 일들을 한 큐에 마무리 하겠다는 압박감은 버려. 뭐 세금을 내야된다거나, 업무처리를 언제까지 해야한다 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그런 것들은 제외하고, 소소한 일들 부터 큰 일들 까지 모두 적용되는 제안이야. 뭐 나도 네 성격 잘 알지. 시작은 쉬운데 마무리를 못하는 것이 항상 단점이라고 얘기 해왔잖아. 근데 지금의 너에게는 중간에 그만 둘지라도 일단은 시작이라도 했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해. 마무리를 하지 못한다고 너를 탓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자. 한 번에 오랜시간을 투자해야 집중력도 강해지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 굳이 지금 시점에서는 불필요한 생각들이야. 우선은 네가 먼저 활력을 찾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자. 예를 들어 지금 이렇게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시간도, 벌써 짧게 끊어서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아. 하루에 단 한줄이라도 적어내려갔으면 그걸로 된거야.
세 번째는 시간을 무조건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 시간에 압박을 항상 느껴왔던 너는 조금의 여유시간이 있을 때마다 꼭 무언가로 그것을 채우려고 애썼지. 하다 못해 없던 생각을 쥐어짜서라도, 그러다 역효과로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해도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해왔던 너야. 과거와 다르게 시간낭비를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너. 네가 가장 열심히 살았다고 꼽는 대학시절을 생각해보자. 그 때는 1교시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뒤, 참 많은 일들을 하고 돌아왔지.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도 거의 받았고, 밴드 생활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했고, 그러면서 틈틈이 알바와 연애도 했어.
반면 현재는 그때와는 달리 너무 대충 살고 있다며 너를 탓해왔어. 너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유시간은 게임으로 채우고 있다며, 그 죄책감 덕분에 쉬어도 쉬는 것 같지도 않았지. 되려 불편해지는 마음과 '운동을 해야하는데...', '독서를 해야하는데....', '취미 생활을 가져야 하는데....' 라는 마음과 함께 그냥 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 그러면서 움직이지 않는 몸과 약한 정신세계를 가졌다며 너 자신을 탓했어.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 생각을 해 보자.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는 편도로 지하철 1시간 30분, 버스로 2시간이었어. 합치면 최대 4시간을 대중교통에서 날린 셈이야. 거기에 알바가 추가되면-주로 갔던 곳이 구반포 지역이었으니까, 학교에서 이동하는 시간, 집에 돌아올 때 추가되는 시간을 합치면 적어도 플러스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 추가되었지. 이 시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주로 했던 것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 아니었나? 책을 읽을 때도 있었지만 버스에서는 메슥거려서 그렇게 자주봤던 것 같지도 않고 지하철을 짧게 짧게 2번이나 갈아타야 했기에 독서하기에 편한 환경은 아니었잖아? 그때 했던 멍 때리며 음악듣기와 지금 하는 멍 때리며 게임하기는 큰 차이가 있을까? 지금 회사에서 집까지는 30여분. 넌 그 알차게 보냈다고 명명한 그 시기보다 여유시간을 하루에 3시간은 추가로 더 얻었다는 거지. 그럼 좀 생산적인 일은 좀 넣어두고 대충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것 좀 하면서 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꼭 그렇게 남도 아닌 내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행복하니?
지금 네 앞가림을 못할 정도로 막 살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 넌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어. 이제는 좀 내려놓아도 괜찮아. 어차피 쉴거면 그냥 나에게 최대한으로 편한 시간을 보장해주기로 하자.
이 편지를 시작한지가 어느 덧 거의 한 달이 지나기버린것 같네. 이제는 정말 슬슬 마무리 하자. 사실 마무리 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건 이미 너의 상태가 충분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너는 나와 편지로 대화를 하는 긴 기간동안, 그리고 다른 시간을 통해서도 너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결론도 내렸지. 그렇게 힘들어 했던 근원에 대해 마주할 수 있게 되었어. 그 근원에 대해서는 아마 언젠가 과거의 너를 어루만져 주는 편지를 또 적게 될지도 모르지.
아무튼 잘 버텨내고 있는 것 같다. 얼마전 드디어 TV가 아닌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영화를 봤고, 간만에 외식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도 했잖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테니스 레슨도 나가고 외부에서 회사사람들도 따로 만나기도 했어. 집에는 이제는 하지 않던 집안일들도 눈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빈 시간을 채워주던 게임도 조금씩 지겨움을 느끼며 블럭조립을 시작했지. 가장 큰 차이점. 블럭조립은 누워서는 할 수 없다는 것. 침대를 벗어나 거실로 나왔다는 것 부터 정말 큰 성과야.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조금씩 해나가는 거야. 계속 더 잘해보자.
무엇보다 다시 너 자신을 포함한 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야. 그리고 또 다시 힘들어질때면 다시 나를 찾아. 그럼 나중에 또 봐.
2023.8.4
OSNA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