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한 권, 펜 하나 다 쓰기가 쉽지 않았다. 내 공책들은 대부분 반 정도 쓰면 사라졌다. 잃어버리거나 다른 새 공책을 쓰거나. 그마저도 앞장만을 썼다. 꽉꽉 눌러쓰는 글씨를 가진 나한테 뒷면 필기는 맞지 않았다. 앞 글씨에 방해받는 것 같고, 글씨를 쓰면서 점점 오른쪽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깨끗한 다음 앞장에 주먹 옆면을 비벼야 하는 게 싫었다.
펜도 그렇다. 모나미 플러스펜을 좋아했는데 펜 주제에 어느 정도 쓰면 연필 마냥 뭉툭해져서 속상했다. 종이에 댈 때마다 찰칵(?)하는 느낌이 좋은 건데. 매력을 잃은 플러스펜은 필통 밖으로 빼내졌다. 그리고 도무지 쓸 게 없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뒤적여지거나, 일 년에 몇 번 없는 방청소 기간에 책상 위에 주룩 쏟겨져서는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계획 없는 오전에 일찍 잠이 깼다. 공책을 꺼내 펜을 들고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누웠다. (전기장판을 빨리 꺼내야지!) 낙서질이나 하려고 종이를 넘겨보다가 내 공책이 맞나 싶었다. 빈 종이가 별로 없었다. 토익스피킹 대본도 적혀있고 인적성 특강 필기도 있다. 간간히 인터뷰 때 쓴 페이지도 껴있다. 제일 빨리 종이를 넘긴 부분은 역시 자기소개서 초안이다. 스스로 "저는 뭐뭐한 사람입니다."하는 문장을 써야 한다니! 백 번 써도 백 번 부끄러울 거다. 글씨는 매번 크지만 펜은 제각각이다. 자기소개는 연필로 써서 앞뒤면에 다 지 흔적을 남겼다.
이 공책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이라서 샀던 거라 겉표지가 미친 듯이 예쁜 것도, 속지가 말도 안 되게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 글씨가 이만큼이나 써진 걸 보니까 마지막 페이지에 욕심이 생겼다. 이 공책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다.
인덱스를 달지 않은 게 첫 번째 이유일 거다. 그냥 얘는 시도 때도 없이 가방에 집어넣어졌다. 급한 아침에는 전날 가방 그대로를 메고 나오기도 했으니까 뜻하든 않았든 매일 나랑 같이 있었다. 학원을 가든, 학교를 가든, 일을 가든. "언제 쓸 공책입니다!"라고 정해두지 않으니까 편하게 집어져서 막 쓰였다. 모나미로 애써 예쁘게 쓰지 않은 이유도 있다. 깎아질 타이밍이 훨씬 지난 연필이든 휘갈겨쓰기에는 충분했다.
과한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기가 쉽다. 다른 과목, 용도를 각각 붙여놓은 공책을 다 쓰지 못했던 것처럼. 그냥 매 페이지를 날마다 채우는 게 좋을 것 같다. 뭘 쓸지 모르고 끄적인 이 글이 이리 길어진 것처럼. 괜한 걱정도 미리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때그때 해."라는 친구의 말처럼. 그럼 좋은 일이 생각보다 많이 생길 수도, 페이지가 얼마나 많든 끝까지 써볼 수도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