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2024). 대온실수리보고서. 창비
피해자 프레임에 우리도 익숙해서일까? 가해자였던 누군가가 시간이 지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해 준 소설이라서 잠시 멍했다.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일제강점기. 그건 명백히 일본 제국주의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우리가 받은 피해와 상처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소설의 백미를 굳이 말하자면 가해자로 분류될 누군가가 그걸 벗어나지 못하고 반대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가해자가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말하고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가해를 가했고, 반대로 굳이 그들 중 일부가 피해자가로 분류가 된다면 그들이 받은 피해가 뭔지 규명되어야 하지만. 그건 역사의 몫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고 도대체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뭐 하는 이들인지 감탄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역시나 작가가 편집자로서 시작된 직장 경험을 잘 버무려 만든 역작일 수밖에 없는 소설. 그가 이를 위해 얼마나 애써서 문헌을 찾아나갔는지. 생각과 역사와 건축과 사람을 엮고 엮어 창경궁 온실을 복원한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 상처받은 기억과 삶을 역시나 복구해서 우뚝 서게 만든. 그러니 허구면서도 허구 일수 없는. 지금 마음이 급해 달려가면 창경궁 온실 앞에서 영두가 마중 나와 따듯한 온실 온기를 전할 것 같은, 소설.
어떤 사연인지 한국에 잔류할 수밖에 없던 어느 할머니는 근대 유명 건축물임에도 제국주의 상징이기에 청산되어야 하지만 살아남은 기구한 운명의 창경궁 온실로 대비된다. 온실이 죄가 없는 것처럼 귀국하지 못하고 남게 된 문자 할머니를 단죄하긴 어려운 법. 문자 할머니와 창경궁 온실이 연결되니, 온실은 단순한 온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모두의 역사가 뒤엉키는 장소가 된다. 결국 창경궁 온실을 수리한 보고서는 온실과 온실에 얽힌 할머니를 드러내 필연적으로 아픔과 슬픔을 촘촘히 묶는다. 종국에는 온실도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굳건히 버틴 것처럼 주인공의 인생도 치유된 추억으로 남아 기억이 된다.
주인공 영두는 창경궁에 있는 대온실 수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친구 은혜의 소개로 맡게 된 계약직 일이거늘. 그럼에도 망설인 건 그곳엔 중학생 시절 잠시 머물던 낙원 하숙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 사춘기 여린 감성으로 버티기 힘들었던 기억엔 문자 할머니와 이기적인 할머니 손녀 리사, 여기에 조미료 같은 원서동 첫사랑 순신이 머물고 있었다. 창경궁 존치야 제국의 손아귀에서 결정되더라도 이를 시행하는 건 사람의 일이라서 실제로 창경궁 온실은 일본인 후쿠다 노보루와 연결되는데, 이렇게 시간은 100년이란 공간마저 담아낸다.
그저 평범할 온실 복원이 누군가의 아픔을 기억하게 하는 건, 이것이 일본이 패망해도 한국에 잔류할 수밖에 없는 문자 할머니 마리코와 연결되기 때문. 이는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수리를 허술하게 할 수 없으니 제대로 복구를 한 그 끝엔 누군가 상처로 남은 기억이 묻어있었다.
패망한 후 돌아가지 못한 잔류 일본인 신세라는 건 없앨까 말까 항상 환영받지 못하는 온실의 처지와 마찬가지였지만. 누구든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쌓는 일이고 그렇게 쌓은 기억들엔 항상 좋은 기억만 있지 않아도 기억을 굳이 소환한다면 그건 상처를 대면할 용기를 가졌다는 것. 그렇게 영두는 비껴간듯한 추억을 불러내 정면으로 맞선다. 결정적인 계기는 온실을 복원할 때 온실 밑 땅에 누군가 죽음이 어른거려서였다. 이건 틀림없이 문자 할머니와 연결될 걸 직감한 영두는 이를 복원토록 하는데. 역시나 온실 지하는 문자 할머니가 어릴 때 겪은 슬픔이 묻혀있다. 결국, 창경궁 온실 수리는 문자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함께 영두를 유지보수시킨다. 지난 상처를 이겨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