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2024). 빛과 멜로디. 문학동네
며칠 전 《빛이 이끄는 곳으로》(백희성, 2024)를 통해 한줄기 빛이 주는 강렬함을 기억해 냈다. 컴컴한 공간에 투사된 빛이라니. 그것도 한 줄기 빛. 그렇기에 그 빛은 기억과 시간을 연결할 수 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해도 이해 됨직한 설정.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뭔가 미진했던 느낌을 들게 한 건 전적으로 이 책 때문이었다. 그건 빛이 주는 다양함 때문인데, 빛이 항상 긍정적이지 않음은 우린 익히 경험했었다. 카뮈가 만든 주인공 뫼르소는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아라비아인을 권총으로 죽였으니. '작열해서 죽였을까?"
읽으면서 어딘가 익숙한 전개 때문에 몇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쁜 기억력을 되짚고 되짚어 보니 읽었던 소설이었다. 이 소설이 아니라 그가 쓴 소설 〈빛의 호위〉 말이다. 그건 단편이었는데. 이건 장편이다. 읽다가 얼마간 답답해서 작가의 말을 뒤져보니 소설 배경을 시리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까지 확장했다는 말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빛의 호위〉의 확장판인데 그냥 양만 늘린 확장판은 역시나 아니었다. 빛이 주는 상징성에 더해 스노볼이 전하는 따듯한 멜로디까지. 이 책에서 사람을 살리는 작은 호의가 빛이 됨을 밝히는데, 여기서 시작은 카메라였다.
어릴 때 승준이 카메라를 아버지 몰래 빼내 고아였던 권은에게 주고. 권은은 이를 통해 세상과 접선을 시도한다. 그때도 세상은 작거나 크거나 분쟁과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찍어낸다. 우리에게 여기 사람이 있음을 알리는 노력은 부상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이때 빛은 강렬한 한 줄기 빛, 어둠을 순간에 관통하는 빛이 아니라,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의 온기"로 가능했다. 카메라가 스노볼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이건 삼십이 년 전 승준이 건넨 작은 호의가 세상에 빛이 되어 따듯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권은, 승준, 애나, 개리 앤더슨, 콜린 앤더슨, 살마, 나스차, 노먼, 여기에 지유까지. 시간과 공간이 같기도 다르기도. 그렇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고통을 받고. 그 와중에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가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고. 시작은 카메라였고 끝도 카메라로 끝나는 소설인데 소설 같지 않은. 어쩜 세상은 인생은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그저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밝게 비췄으면 따스한 온기를 감싸 분쟁과 전쟁이 아닌 화해와 사랑이 전파되었으면, 빛이 주는 온기가 퍼져 세상을 휘감았으면 좋으련만. 우린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음을. 그리되지 않음을. 그럼에도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누군가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던가.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 권은과 승준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와 기자가 되어 다시 만나는데, 그때 권은은 시리아에서 왼쪽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었다. 신체적 장애는 정신적인 장애까지 이어지고. 의욕이 없어진 권은을 이끈 빛은 애나 앤더슨.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게리 앤더슨의 동생으로 게리에 대한 기고문을 쓴 인연으로 권은에게 호의를 베푼다. 영국에 와서 게리 앤더슨의 아버지 콜린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달라는. 콜린은 독일 드레스덴에 폭탄을 투하해 많은 시민들을 죽게 한 장본인. 이렇게 호의는 갈등이 혼재하는 장소와 시간을 넘나 든다.
권은이 장애를 입기 전 난민 캠프에서 알게 된 살마를 통해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살마를 찍으려다 포기를 하는데, 이유는 그녀가 어릴 때 겪은 고아였다는 심리적 망설임. 이로 인해 그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는다는 명목으로 결코 자기 삶이 그들과 같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건 카메라라는 특성이 가져다준 것.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피사체와 거리가 유지해야 하거늘, 이를 넘어선 작가가 게리였고. 그러니 게리를 존경하면서 그가 뿌린 씨앗이 권은에게 전달되어, 살마의 삶 또한 권은이 베푼 호의로 영국에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한다.
한편 권은과 결코 연결되지 않을 나스차의 불행은 승준이 베푼 호의를 통해 권은과 연결된다. 나스차는 한창 전쟁 중에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임산부. 이게 가능한 건 최근 승준이 아빠가 된 것. 지유 아빠. 소설은 어릴 때 승준이 베푼 호의가 권은에게 연결되고 권은에게 베푼 애나의 호의가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 작은 빛이 되어 서로를 연결시킨다. 사실, 작가는 알고 있다. 전쟁으로 고통받은 이라크가 쿠르드 족을, 식민지로 힘겨웠던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에게 퍼붓는 폭탄 세례가 자행되었음을. 그럼에도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러니 그냥 살자고 말할 수는 없지 않던가. 그럼 작가가 아닐 테니. 그럼 소설이 말 그대로 소설 쓰고 앉아있네,라는 냉소만 남을 텐데.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분쟁과 전쟁을 담다 보니 전개가 조금 흐트러져도 슬프지만 아름다운 소설. 카메라 속성상 어쩔 수 없이 피사체와 갖는 거리감은 그저 부수적일 듯. 부수적이어야 하듯. 작가가 소설이란 도구로 세상을 드러낼 때 또한 어쩔 수 없이 거리감은 존재할 터. 그럼에도 이런 노력으로 세상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퍼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