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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코끼리 Jan 22. 2021

나의 첫 e-book

 아무튼, 하루키

 는 디지털에 약한 편이라 아날로그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에는 핸드폰 화면으로 보는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단연코 종이책을 선호했다. 내가 e-book을 사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복강경 수술을 한 뒤에 무거운 짐을 드는 일은 한 달간 피해야 한다기에, 가방 안에 책을 넣고 다니는 일이 부담되어 e -book을 처음 사보았다. 수많은 책들 중 무슨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이지수 작가의 <아무튼, 하루키>를 샀다.


  책을 고른 이유는 이렇다. 최근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읽었는데, <100만 번 산 고양이>유명한 동화 작가 사노 요코의 수필집이다. 시크한 독거노인의 참신한 생각과 개성에 피식피식 웃음이 삐져나오는 책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재미있어서 언니와 엄마에게 이 책은 꼭 빌려주겠다고 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혼자 웃기가 너무 아까워서, 엄마와 언니에게 사진으로 찍어 보내 주다가 스포 하지 말라고 혼났다.) 저자가 쓴 글이 재미있기도 하겠지만, 어떻게 이런 단어를 찰떡같이 여기에 번역하여 썼을까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는 사노 요코 할머니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휑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암 때문에 인생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우울증이 말끔히 사라지고,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던 그녀. 더 이상 그녀는 없지만, 그녀가 쓴 수많은 글들은 아직 많기 때문에 나는 두고두고 읽을 요량이었다.  사노 요코의 <자식이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그래도 괜찮아>등의 산문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이지수 님 번역이었다!


사는게 뭐라고 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한류드라마 부분(스포할까봐 고심하여 한 페이지만 고름)


 개인적으로 번역된 외국서적을  읽을 때 작가뿐 아니라 옮긴이의 역량도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매는 대학생 시절 일본문학에 흠뻑 빠져있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내에 취하면서도 막상 최고 좋아하는 작가를 고르라면 단연코 에쿠니 가오리였다. 에쿠니 가오리의 잔잔함에 반해 한동안 그녀의 모든 책은 모조리 다 샀다. 에쿠니 가오리와 김난주 번역가의 궁합은 그야말로 딱 우리 취향이었다. 우리는 같은 작가의 글이라도 번역가에 따라 분위기가 결정된다고 믿었기에,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김난주 옮김'이라는 글자를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작가의 글과 번역가의 글맛이 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무튼 나의 오랜 숙제인 복강경 수술이 끝난 뒤,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일에 복귀하기 전 책이라도 많이 읽어야겠다, 싶어 기다리고 있던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사러 서점에 갔다. 하필이면 사노 요코도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때 쓴 글이었기에, 유쾌한 그녀의 글도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책을 살 용기가 지금은 없었다. 운이 좋게도 <자식이 뭐라고> 책도 한 권 남아있었는데, 그 책 역시 내용을 훑는데 저자가 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자꾸 상기되어 마음이 힘들어졌다. 패기 있게 찾아온 서점 한 구석에서 나는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아빠 생각에 이 책들을 살 에너지를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빈 손으로 나왔다.  그  날 집에 와서 <사는 게 뭐라고>를 읽으며 느꼈던 재미를 어디서 찾을까, 하다가 이지수 번역가가 직접 수필 책 <아무튼, 하루키>를 e_book으로 사기로 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번역하고 싶어 번역가가 되었다는 이지수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니, 내가 읽었던 무라카미의 책들부터 H.O.T, 육아, 안양(나의 친정도 안양) 이야기가 나와 공감되고 반가웠다. 특히 육아에 관한 글은 어쩜 그리도 내 마음을 이렇게도 재미있고, 적나라하게 표현해줬는지. 나의 고생이 나만의 것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구나, 라는 위안을 얻었달까. 

 각오는 했지만 육아는 정말이지 다른 차원의 고행이었다. 아들이 태어나자 내 신체와 정신이 모두 이 작은 인간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것 같았다. 작은 인간을 먹이고 씻기고 똥오줌을 치우고 안은 채로 밥과 빨래와 청소를 하고 (가끔은 볼일도 보고!) 그러면서 동시에 기저귀와 분유와 물티슈와 기타 등등의 육아템을 떨어지지 않게 구비해주는 데 내 모든 기력을 다 썼다. 기진맥진이 기본 컨디션이었다.  
 어째서 육아는 더럽게 고생스럽고 피눈물 나게 힘든 일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여태 없었을까. 문명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한 모종의 엠바고 같은 거겠지. 아니면 육아에 뒤따르는 희생을 모성과 부성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사회 분위기상 갖은 고생담은 경험자들끼리 쉬쉬하며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증거로 내가 출산하자 주위의 육아 선배들이 아련한 눈빛으로 "많이...힘들지?"하며 지옥 구경이라도 하고 온 듯한 경험담을 들려줬으니까. 그들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마지막에는 꼭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시간은 가더라."            
                                   
  이지수 < 아무튼, 하루키> p47


 역시 위트 있는 문장들이 자주 나와 즐겁게 술술 읽히는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녹아있는 저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는 반려묘 '디'의 죽음에 관한 글을 읽고 있는데 , 아빠가 큰 병에  앓다가 떠난 일이 생각나 동병상련에  푹 빠진 채 글을 읽었다. 


 무게도 무게지만, 종이책은 준비가 되어있을 때만 읽을 수 있는 반면 전자책은 언제 어디서나 펼 수 있으니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그래도  물론 종이책이 더 좋지만. 아이들을 재우고 어둠 속에서 글을 읽으며 내 세계에 잠시 퐁당 다녀올 수 있는 것이 가히 매력적이다.


 시간이 흐르고, 둥둥 떠있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나의 마음에 스며들어 삶의 일부가 되면, 나는  다시 사노 요코의 글+이지수 번역의 콜라보를 찾아 읽를 시도할 것이다. 그때도 두 손 가벼운 전자책을 선택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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