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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코끼리 Mar 25. 2021

밤 열한 시의 화장대

에세이스트 (ESSAYIST) vol.1에 수록된 글

피곤한 몸으로 퇴근을 하고 이어서 전투 같은 육아가 끝나면,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 비척비척 지친 내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욕실이다. 새로 이사 온 집의  하얀 욕조가 내 맘을 사로잡았다. 몇 달 전만 해도, 바로 이곳이야 말로 나를 위로해줄 장소라고 믿었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를 읽고, 친구들과 메시지도 주고받는다. 종종 어플로 글도 읽는다. 내 몸을 이 예쁜 욕조에 푹 담그듯, 나도 이 시간에 푹 빠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나는 무언가 불안하다. 역시, 오늘도 변함없이 남편이 노크를 하고 불쑥 들어온다.

 "은이 깬 것 같은데?"     

 맨 몸뚱이로 수건을 대충 두르고, 물을 뚝뚝 흘리며 전속력을 다해 달린다.

 "은아~엄마 간다!"


 둘째 은이는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계속 낸다. 이럴 때 남편이 들어가면 더 울기에 꼭 내가 들어가야 한다. 만만치 않던 첫째는 이제 제법 컸다고 이런 소음에도 푹 잘 잔다. 운이 좋으면 은이는 바로 진정이 되지만, 운이 안 따라주면 시간이 꽤 걸린다. 아이가 다시 잠들고 나면, 이미 반신욕을 할 마음은 싹 사라져 있다. 불안에 떠는 반신욕 따위 안 하는 게 낫다. 속상한 마음으로 욕조의 마개를 연다. 회오리치며 빠져나가는 물들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본다. 안녕,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몇 번의 같은 경험이 쌓이자, 나조차 모르게 어느새 나의 힐링 장소와 시간이 바뀌었다. 아이들과는 적당히 떨어진 곳, 그러나 내 귀로 은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 아이들이 좀 더 깊이 자는 시간. 그렇게 나는 언제부터인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씻고, 자고 있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준 뒤 "밤 열한 시의 화장대" 앞에 오롯이 앉아 있었다.     

 

 나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화장대에서 아침에 하는 일이라고는 잽싸게 간단한 기초화장품과 썬 쿠션을 바른 뒤, 눈썹을 그리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밤의 화장대는 다르다. 그 시간, 그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그에 비해 시간이 짧은 것이 흠이지만.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헤어드라이기를 든 채 나의 작은 소확행이 시작된다. 머리카락이 대충 마르면, 로션을 탁탁 바르며 비로소 오늘의 내 얼굴을 거울로 찬찬히 들여다본다. 매일 기미가 더 진해지고, 눈가의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숱은 줄어 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나는 거울 속 나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오늘 하루도 힘들었네. 진짜 고생했다. '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나면 기미도, 주름도, 머리숱도 마침내 조금은 사랑스러워진다. 이렇게 나는 중년을 향해가고 있구나. 어릴 때는 엄마가 한밤중 세수를 하고 나서,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개운할 줄만 알았다. 어쩌면 그때, 엄마도 나처럼 조금은 서글프고 애처로운 기분으로 스스로를 응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화장대에 불량스럽게 다리를 올려놓고, 회색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책을 읽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읽고 있는데, 암에 걸린 동화작가 할머니의 시크하고 유쾌한 산문집을 읽노라면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사는 게 뭐라고!     

 거실에 있던 남편은 내가 안방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 싶으면 조용히 들어와서는, 무심한 척 그러나 매우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내가 보고 있는 폰 화면이나 책을 슬쩍 본다. 한 번은 이거 들어봐, 하고 남편을 붙잡고는 <사는 게 뭐라고>의 글 일부분을 읽어주었다. 한류드라마에 관한 위트 있는 글이었는데, 총 두 페이지를 읽어주는 동안 남편은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듣는 표정이 심드렁하다.

 "너무 웃기지 않아? 나는 이 책처럼 웃으면서 책을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라고 말했더니

 "그래, 그 책이 너한테는 웃겨서 다행이네."

 라고 얘기한 뒤, 나무늘보라는 별명에 걸맞게 느릿느릿 거실로 다시 나갔다. 나는 피식 웃고, 다시 나만의 독서를 시작한다.     

 

 화장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조금 더 힘을 내 하루하루를 달리고 있다. 오늘은 그 찰나의 시간에 나의 화장대에서 무슨 일을 할까. 나의 얼굴은 어떻게 보일까. 주름을 펴준다는 와일드 시드 크림이 도착했으니, 개봉해서 발라줘야겠다. 그리고 오늘도 내 눈을 보고, 고생했다고 토닥토닥 응원해줘야지.     


 생각만 해도 역시 좋은, 밤 열한 시 나의 화장대.     




고수리작가님 코멘트

집 어딘가 나만의 방공호를 만들고 거기서 즐기는 짧은 시간에 대하여, 소소하고 자유로운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사노요코 할머니와도 비슷한 느낌이에요. 자연스러운 글투와 서사, 생활과 사유가 묻어나는 시선, 커다란 긍정과 위로가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하지 않아? 빙그레 웃는 태도가 담백했어요. 중년의 얼굴을 화장대에 비춰보는 부분이 가장 좋았는데요.
'기미도, 주름도, 머리숱도 마침내 조금은 사랑스러워진다'는 순간에, 글쓴이에게 반하고 말았습니다.





작년 11월에 서사,당신의 서재에서 진행하는 <고수리작가님과 함께 하는 에세이집 만들기>에 신청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작가님이 방향을 제시해주어 하나의 글을 완성했다. 총 39명의 글과 사진 그리고 고수리작가님의 코멘트로 이루어진 잡지책이 드디어  오늘 받았다. 내 글의 정식출간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담긴 첫 책이니 의미가 깊다. 기쁘지만 부끄럽기도 한 미묘한 감정. 써프라이즈 같았던 고수리작가님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다른 분들은 어떤 글을 썼을지 궁금하다. 책도 예쁘고 글들에 정성이 묻어난다. 찬찬히 하나씩 아껴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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