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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코끼리 Sep 21. 2021

왜 그래 대신, 괜찮아

야자와 노래방 그리고 친구 현

어제 친구 현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요즘 고등학교 때 현과의 한 추억이 자꾸 생각나는 중이었다. 그 기억 속에서 현과 나는 노래방을 가고 있었다. 모의고사를 본 날이었다.

"우리 오늘 야자 째고, 노래방 가자!"

누가 먼저 제안한 것인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아무튼 우리는 야간 자율학습을 젖혀두고 몰래 노래방을 다녀왔다. ('야자 빠지고'라는 말은 '야자 째고' 의 느낌을 따라올 수가 없다. 그나마 '야자 튀고'가 차선책. 야자는 꼭 째야만 했던 그  때 그 시절 .)밝은 초저녁시간에 나가 노래를 한껏 부른 뒤, 칠흙같이 어두운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교실로 들어가니 금세 야자가 끝날 시간이 되어 평소처럼 집에 갔다.


현과 나는 같은 반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은 문과, 나는 이과였고 각자 노는 무리가 달라 함께 할 시간이 많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종종 쉬는 시간이 되면 우연히 마주쳐 수다를 떨었고, 주말에는 독서실을 오가다 마주치는 반가워했다. 친구는 팝송을 즐겨 들었다. 나에게는 익숙치 않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최신 팝 가수들의 테이프를 한번씩 빌려주었는데 그럴 때면 현은 나보다 훨씬 언니같이 느껴졌다. 세련된 언니. 현이 빌려준 테이프를 들으면서 낯선 팝송 리듬에 맞춰 수학의 정석을 풀면 고3의 스트레스는 조금 덜 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책과 문제지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같이 힘든 고3임에도 은 이야기 대신에

"힘들지, 이 노래 들어봐. 빌려줄게."

하는 현을 보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노래방을 가던 그날의 우리가 모의고사를 잘 치렀는지, 망쳤는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모의고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야자를 빼먹고 노래방을 가 일탈의 짜릿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위로 남아 있을 뿐이다.  추억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빛이 바래지고 따뜻해진다.


 우리는 신기하게도 원할 때 임신이 안되어 매우 괴로운 시기를 함께 겪었다. 내가 먼저 임신에 성공했을 때 현은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현이 임신했을 때 또한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우리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출산했음에도, 마냥 그 즐거움이 유지될 수는 없었다. 나의 아들과 현의 아들, 두 아이는 모두 까탈스러웠다. 무엇보다 잠을 푹 자지 못하고 밤새 깨서 자지러지게 울길 반복했다. 우리는 카톡으로 자주 서로를 위로했다.  중 한 명이

"애가 밤새 못 자니까 힘들어 죽겠어. 왜일까?"

 말면,

"시간이 해결해 겠지.애들이 다 그렇지."

라는 말 대신,

"나도야. 진짜 미칠 것 같다. 욕이 나올 지경이야. 너무 힘들지?"

고 대꾸했다. 

"나는 이미 욕이 입 밖으로 나왔는 걸."

진심이 더해진 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속상함을 조금은 흘려보낼 수 있었다. 주변에 순한 애들이 왜 이리 많냐며 신기하다는 탄식도 함께 했다. 그 아이들이 이제는 꽤 지만 육아의 고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난번에 내가 그녀에게 전화한지 몇 개월만에 현이 오랜만에 전화를 한 이유도 역시 육아에 대한 또 다른 민이 닥쳐 고충을 토로하기 위해서였다.

"짜 너무 힘들겠다. 우리 애들이 이다음에 아마 다른 애들보다 훨씬 효도하려고 이러나 봐."

우리는 오랜만에 또 많은 이야기를 순식간에 하고, 각자의 아이들을 보살필 시간이 와 급히 전화를 끊었다.


한강의 시를 읽다가 울컥, 그리고는 전 날 통화했던 현을 문득 떠올린다.




한강 <괜찮아>


왜 그래, 대신 괜찮아.

그 위로가 현과 나를 어루만져준다. 그러고 나면 끝없이 가라앉던 현과 나는 조금은 그 늪에서 빠져나와, 아이들에게 한숨 대신 미소를 지어줄 힘을 얻는다. 이제는 야자 째고 노래방 가듯, 현실에서 도피할 수는 없지만. 팝송을 빌려주고, 노래방을 가던 그때의 우리처럼 아마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서로를 토닥이는 존재로 늙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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