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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Mar 06. 2020

한국에서 혼혈로 산다는 것(3)

내가 경험한 다문화가정 지원프로그램


최근 한 비영리 재단의 전략기획팀에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지원서를 썼다. 그 재단이 취약계층이나 노인뿐만 아니라 다문화 가정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서류부터 보기좋게 떨어졌지만ㅎ 다문화가정의 일원으로서 나의 과거를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였다. 그래서 오늘은 중학교 때 내가 경험했던 ‘다문화 가정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학교에는 나처럼 어머니가 일본인인 남자아이, 아버지가 러시아인인 여자아이, 어머니가 중국인인 여자아이 등 여러 국적의 부모를 지닌 아이들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이유로 교무실에 불려가 그 프로그램에 차출되었다. 그리고는 주기적으로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야만)했다.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고는 하는데 우리가 하고 싶은 걸 물어보기는 했나? 설문이라도 했던가? 10년도 더 된 일이라 세부절차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를 위해 짜여진 스케쥴에 시간을 내어 참여했다.


전주한옥마을 가기, 도자기 만들기, 천연염색하기, 케이크 만들기를 했다. 굳이 가야하나 싶었지만 막상 가면 재미있게 놀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학교가 굳이 예산을 써서 이런 프로그램을 제공할만큼, 우린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과 구별되는 아이들인가?’

‘왜 한옥마을에 가고 도자기를 만들고 천연염색을 하는걸까? 한국인의 정서를 기르라는건가?’

공짜로 문화생활을 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근데 뭐랄까. ‘보통’의 아이들과 구분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 일방적으로 주입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의 중학생들도 저런 체험을 드물게 하지 않나. 즉 다문화 가정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한국에 일체감을 느껴라! 이런 느낌이었다.


뭐 대충 이해는 한다. 두 나라의 정체성을 가진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한국 적응’을 돕기 위해서 한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한국 전통 체험을 제공하기보다는 개인별로 한국 생활의 어려운 점을 묻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꼬옥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싶다면 참여 당사자인 우리의 니즈를 묻고 그에 따라 프로그램을 짜야 할 것이다. 참여의사가 없으면 프로그램을 무산시키든지. 최소한의 물음도 없이 다문화라는 이유로 불려가서 선생님이 참여하라고 하니까, 학교 예산이 우릴 위해 쓰였다고 하니까, 그 말을 거스를 수가 없어 참여하는 식의 프로그램은 학교측의 자기 안위를 위한 행정과 같다. ‘우리 학교는 다문화 가정을 위해 이런 것도 하고있는 훌륭한 학교랍니다!’와 같은. 우리는 한국을 제외한 서로의 나라(러시아, 일본, 중국 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데면데면한 채로 도자기를 만들고 염색을 했다. 내가 가진 국적 정체성은 엄연히 두 개인데 하나만 가지고 살라는 느낌이었다.


즐거웠으면 된거지 왜 따지냐고 묻는다면, 글쎄. 지원 대상자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상자를 더 소외시킨다. 나같은 경우는 한국에 ‘적응’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차출되어서 ‘아 나는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이구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급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 시간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남자 아이의 얼굴도 잊지 못하겠다. 다문화 시대라고 하면서 한국인은 한복, 일본인은 기모노, 중국인은 치파오를 입고 다같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클리셰. 그거나 저거나 창의적이지 않은 건 똑같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한국의 신조어나 더 알려주는게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 ‘적응’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는 비단 내가 경험한 다문화 프로그램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는 사용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공급자만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이 널렸다. 일례로 중학교 때 내 친구는 기초생활수급자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팩우유를 30개나 받았다. 중학생 여자아이가 그 많은 우유를 어떻게 들 것이며, 그 많은 우유를 교무실에서 집으로 들고가는 아이를 보며 다른 친구들은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우유 먹고 싶은 사람?’ 학교는 그 친구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친구에게 우유의 무게는 가난의 무게였을지 모른다. 소수자에 대한 지원을 개인화하기 어렵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몇분기에 한 번 수요조사쯤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바뀌어가는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지원책도 변화해줄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어떠려나. 요즘 중고등학생 친구들도 다문화 가정끼리 모여서 저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 때보다는 대상자의 심중을 고려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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