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예술의 드라마틱한 장면들 (1)

시프리앙 가야의 폐허-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소비주의

by 유산균

참여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작업 컨셉을 꼽는다면, 작가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나 작품을 변형시키거나 유무형의 작품 일부를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반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라는 작가는 1995년 Take me, I'm yours 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교양 있고 조용하게 움직여야 하고, '만지지 마시오' '다가서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가져가세요! 여러분의 것입니다' 라니. 볼탕스키는 전시장을 일종의 벼룩시장으로 사용했는데, 미술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기만 하면, 사탕 더미, 옷가지, 기념품 등등 다양한 잡동사니들을 종이가방에 담아 올 수 있는 벼룩시장과 같은 전시였다. 처음 이 전시를 보았던 95년의 관람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 그 문구도 작품의 일부려니 하고 남들이 주워 담기 전에 혹은 안내자가 권유하기 전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지 않았을까?


2017년 monnaie de Paris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앵콜 전시가 열렸다. 22년이 지난 지금의 관람자들은 95년의 쭈뼛쭈뼛한 관람자들보다는 더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작가들이 펼쳐놓은 물건을 주워 담지 않았을까? 마치 백화점 혹은 기념품점에 와있는 듯한 관람객들의 신나는 표정을 본다면, 이제 이런 컨셉 쯤은 익숙해져 버린 2017년의 맥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christian-boltanski-take-me-im-yours-est-une-exposition-ou-tout-doit-disparaitre,M255624.jpg 출처: : Monnaie de Paris


여기에서 던져보는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만약 전시장에 온 어떤 관람객들도 이 작품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고, 볼탕스키와 비슷한 컨셉의 전시를 시도했던 수많은 작가들 중 시프리앙 가야를 소개한다. 아마 그의 이름이 국내에는 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매 해 젊고 창의적인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마르셀 뒤샹 상을 수상 작가로 미술계에 이름을 남겼다. 시프리앙 가야는 세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역사적 장소들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는데, 기억의 장소성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다른 작품들과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역사와 장소라는 일관적인 주제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전시를 2011년 베를린의 KW 갤러리에서 열었다.


The recovery of Discovery (발견의 복원)이라는 제목은 그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작품의 형식은 이렇다. 그는 터키산 수입맥주인 에페 필스너 72,000병을 주문한다. 도착한 맥주 박스를 쌓아 올려 전시장의 중앙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가야는 관람자들이 피라미드 위로 자유롭게 올라가 박스를 열어 맥주를 꺼내 마시도록 안내했다. 관람자들은 충실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마치 금요일 저녁의 노천 바에서나 볼만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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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맥주를 마신 관람자들은 자신들이 마신 빈병과 자신들이 뜯은 박스를 고스란히 그 자리에 남겨두고 위 장면과 함께 유유히 자리를 떴다.


문화인류학적 고찰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와 몇몇 미술사학자들의 비평이 현장과 잘 일치했다. 이집트(에베소)를 상징하는 피라미드라는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공간을 제국주의적 소비가 무너뜨렸다는 꽤나 명쾌하고 좌파적인 해석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서구 열강에 의해 폐허가 된 세계들에 대한 프랑스 젊은 작가의 영민한 리포트에 많은 이들이 호응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이 장면의 방점을 관객의 참여라는 좀 더 일차적이고 물리적인 시점으로 이동시켜보자. 이렇게 작가의 목적을 잘 구현했던 이 '폐허'는 며칠 뒤 전시장을 보기 위해 찾아온 대 여섯 사람의 방문으로 변화에 직면한다. 청소도구를 들고 전시장에 들어온 이들은 깨진 병과 조각난 박스 조각들을 그들의 봉투에 담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 폐허는 정돈된 모뉴먼트로 다시 정비되어 갔다. 마치 문화재 보수 작업자들의 손놀림처럼. 전시장을 지키는 사람들이 당황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외국에 있던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막상 작가는 별생각 없이 그냥 놔두라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시 장면을 보존하고 싶었던 기획자는 일하는 사람들을 시켜 저 폐허 장면을 다시 재현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다시 던져보는 질문, 만약 전시장에 온 어떤 관람객들도 이 작품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혹은 수상한 방문자들의 청소를 그대로 두었다면? 참여예술에서 관객의 참여는 어느 선까지 제한될까?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자유? 파괴된 장면을 다시 의도적으로 연출해 낼 자유?


참여예술에서의 관객의 자의식과 관련해 생각해볼 문제이다. 막상 시프리앙 가야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해프닝은 작가의 손을 떠나 관객의 반응에 넘겨진 작품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라는 시나리오를 벗어날 수 없음을 방증하는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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