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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15. 2022

카탈리스트 vs. 까탈리스트

일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우리의 클라이언트느님에 대하여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저의 본업은 브랜드 컨설턴트입니다. 컨설턴트의 일이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브랜딩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면 일의 범위와 예산이 적정한지 살펴봅니다. 이에 덧붙여 더 깊은 고민을 한 후 프로젝트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데,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곱하기 '(아주 낯익은 분야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에 대한 것입니다. 브랜드 컨설턴시의 대표가 아닌 컨설팅 펌의 직원으로 일했을 때는 후자는 크게 결정요소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일을 가려서 할 수 없는 조직 구조였으니까요. 그렇다고 대표로 일하고 있는 지금이 100%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만 '아예 결정할 수 없음'과 '그래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용기를 내볼 수 있음'은 차이가 큽니다. 가능하면 가슴이 뛰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날들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결정을 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일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일의 진짜 주인공 - 바로 일을 의뢰하고 맡기는 클라이언트입니다. 영어로 CLIENT죠. 고객, 혹은 의뢰인이라고도 합니다. 흔히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일을 수행하는 컨설턴트의 능력에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라고 큰 액수의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일을 좀 해봤다는 분들은 모두 느끼는 사실일 것입니다.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든다는 말은 더 말하면 입 아픈 관용 문구가 되었으니까요. 분명 컨설턴트는 같은 사람인데, 왜 어떤 기업은 일을 흥하게 하고, 또 어떤 기업은 일을 망하게 할까요.


클라이언트의 어원


CLIENT는 라틴어로 '숙인다'를 뜻합니다. 편하게 기대어 쉰다라는 뜻의 'recline'도, 경사를 뜻하는 'incline'의 어원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서로 머리를 맞대고 기대어 풀어간다는 의미가 CLIENT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각도가 맞지 않고 뒤엉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첫 번째는 프로젝트의 end picture, 즉 결과물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입니다. 디자인 프로젝트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서 그나마 혼란이 덜하지만, 브랜드의 핵심 가치나 메시지, 스토리, 아이덴티티 시스템 등과 같은 무형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처음에 결과물의 기대 수준을 합의하지 않으면 종국에 서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컨설턴트는 오늘부터 1일입니다


프로젝트 결과물에 대한 합의를 잘 마쳤다 해도, 복병은 또 있습니다. '일을 명확히 맡겼으니 결과물은 알아서 잘 해오겠지'하는 마음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클라이언트는 수개월 혹은 수년간 그 브랜드가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구석구석 먼지까지 살필 수 있지만, 처음으로 프로젝트에 발을 담근 컨설턴트는 프로젝트 시작일이 '오늘부터 1일'입니다. 아무리 회사와 관련한 자료를 많이 넘겨준다 하더라도, 아무리 연륜 높은 컨설턴트라도 '오늘부터 1일'인 컨설턴트의 지식이 클라이언트만큼 깊을 리 만무합니다. 과거를 회상해 보자면, 프로젝트에 켜켜이 쌓여 있는 스몰 디테일들과 이슈들을 클라이언트가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이야기해준 프로젝트의 성공률이 그렇지 않은 프로젝트보다 항상 높았습니다.


NOT 까탈리스트, BUT 카탈리스트


클라이언트는 컨설턴트가 제시하는 결과물을 날카로운 눈썰미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하는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눈썰미는 함께 일을 하는 기간 동안 서로의 머리와 마음의 싱크로율을 높여놨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평가를 위한 평가만이 이루어질 때, 일을 맡긴 사람도, 일을 하는 사람도 '여긴 어디 난 누구'를 되뇌게 됩니다. 그렇기에 멋진 브랜딩 작업을 만드는 것은 클라이언트 일의 촉매제, 즉 카탈리스트Catalyst가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그저 까탈스러운 까탈리스트가 아니라 말이죠. 클라이언트가 까탈리스트를 넘어 일의 카탈리스트, 촉매제로 역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웃풋의 상상지도를 그리자 


먼저 일의 아웃풋, 즉 결과물의 상상지도를 그려보는 겁니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브랜드 슬로건'이라면 그러한 슬로건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 확장되기를 바라는지 더 넓게 생각해 봅니다. 결과물의 레퍼런스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공유해도 좋습니다. '우리 결과물은 레퍼런스를 따르지 않았으면 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를 따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젝트 말미에 서로 '내가 말했던 건 이게 아닌데?'라고 당황하지 않을 프로젝트 '상'을 보험처럼 마련하자는 말입니다. 똑같은 'freshness’를 말한다고 해도, 그 뉘앙스에 어울리는 사진의 톤, 말투, 메시지의 성격, 페르소나의 결은 수천 가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RFP (Request for Proposal), 업무 의뢰서에 업무 Scope을 정해 놓았잖아요-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어떤 결과물의 상으로 발현되었으면 하고 바라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스몰토크가 중요해 


최근에 저도, 클라이언트도 서로 한껏 만족하며 마무리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평소에 하던 방식, 워크숍, 보고서까지 여타 프로젝트들과 크게 과정이 다르지 않았는데, 왜 이 프로젝트는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다른 프로젝트들과 가장 달랐던 것은 스몰토크였습니다. 프로젝트 의뢰서에 적혀 있는 업무 리스트 그 안에 숨은 고민들, 해왔던 노력들, 가고 싶은 방향들을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나눈 스몰토크의 시간들이 비결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공식적인 언어, '표면어'만 주고받았다면 그 안에 숨은 '내면어'를 발견하지 못했겠지요. 물론 클라이언트는 대부분 바쁩니다. 그래도 함께 잠시 차를 마시고, 함께 길을 걸으며 내면어를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나도 모르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의 진실에 다가가기 더 쉬울지 모릅니다.


좋은 효모가 맛있는 막걸리를 만듭니다. 우리의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까탈리스트가 아닌 카탈리스트가 되어줍시다.

Hyewon Kim
Founder of Branding Company - notAbu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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