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관계를 만든다
“마음으로 건넨 선물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 테오도어 루즈벨트
최근에 받은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본다.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받은 아이스크림 케이크, 값비싼 니치 향수도 떠오른다. 질문을 바꿔 ‘기억에 남는 선물’을 떠올려 보면 11살 딸이 클레이 점토로 만들어준 ‘반려돌’이 떠오른다. 딸 다인은 반려돌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에 대한 ‘반려돌 사용 설명서’까지 써서 함께 선물해 주었다. 마음 한켠에 엷은 불안을 품고 사는 엄마에 대한 위로였을까. 좋은 선물은 ‘나를 생각한 흔적’을 남긴다. 마음으로 건넨 선물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선물, gift는 ‘주다’는 의미인 ‘give’에서 비롯되었다. 사물이 관계 이전의 ‘thing’ 이라면 선물은 이미 그 이름에 주는 이와 받는 이의 관계가 담겨 있다. ‘나는 이걸 줄게, 너는 뭘 줄래’가 거래라는 시장경제라면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비시장적 감정경제다. 선물로 이어진 관계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준다.
선물은 상징이고 메시지다
선물은 말하지 않고 말한다. 주는 이의 의도가 담긴 상징이 선물의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세 가지 선물을 했다. 금, 유향, 그리고 몰약. 금은 ‘왕권’을, 유향은 ‘신성’을, 몰약은 ‘죽음’을 상징한다. 이는 단순한 탄생 축하가 아니라, 예수가 ‘왕이며 신이자 죽음을 맞이할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선물이었다. 누군가 건강하기를 바랄 때 ‘정관장’으로 ‘면역력’을 선물하듯, 우리는 선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건넨다.
말보다 오래된 언어, 선물
언어 이전에도 선물은 존재했다. 남극의 수컷 아델리 펭귄은 매끈한 돌 하나를 암컷에게 건넨다. 극한의 환경에서 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돌이지만, 이 돌은 생존을 넘어선 구애의 언어가 된다. 암컷이 그 돌을 받아들이는 순간, 짝짓기는 이루어진다. 이 작은 무언의 선물은 생명을 이어가는 약속이다. 이처럼 선물은 관계를 빚는 감정의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질서의 시대, 선물은 권위의 언어였다
선물의 기원을 생각해 보면 받는 이의 감정을 헤아리는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다. 인류의 초기 선물은 원시 시대 사냥 후 음식을 나누는 행위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한 호의를 넘어 생존을 위한 협력의 신호였고, 공동체 내 신뢰를 구축하는 전략적 행동이었다. 농경사회로 접어들며 계급과 상하관계가 공고해지면서 선물은 점점 위계의 상징이 되었다. 왕이 신하에게 내린 하사품은 권위의 표현이었고, 신하가 바친 진상품은 충성의 증표였다.
선물은 국가 간 힘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나라 황제는 조공국에 명나라 달력을 선물했는데, 이는 단순한 선물을 넘어 시간을 결정하는 주체이자 문명의 중심은 명나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상징적 선물이었다.
그런가하면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이 선물이 되기도 했다. 1516년,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와 1세는 문화 강국 프랑스를 향한 비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해 그에게 ‘왕의 제 1화가이자 건축가’라는 칭호와 함께 연금과 명예를 부여했다. 그는 단지 예술가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살아 있는 예술'을 선물한 셈이다. 프랑수와 1세는 예술과 철학을 통해 ‘프랑스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상징적 왕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판다 외교'가 선물의 새로운 스케일을 보여줬다. 중국만의 상징적 자원인 판다는 외교적 우호의 상징으로 선택되었고, 국가 간의 관계 형성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판다는 국교 정상화의 선언이었고, 그 뒤로도 여러 나라에 판다가 보내지며 선물은 소프트 파워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선물의 진화, 물건에서 경험으로
상하관계가 뚜렷하던 시대의 선물이 다분히 시혜적이었다면, 평등한 개인의 시대의 선물은 호혜적이다. 그리고 물건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선물 또한 물질을 넘어 경험으로 진화 중이다. 우주 여행 티켓을 선물하거나 DNA에 기반해 한 사람만을 위한 와인을 선물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별에 붙여 하늘에 선물하는 낭만은 선물의 물성을 넘어 경험과 감정을 전한다.
기억에 남는 브랜드는 좋은 선물처럼 다가온다
선물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처럼 기억에 남는 브랜드는 고객에게 좋은 선물처럼 다가온다. 필요해서 사는 물건은 ‘만족’ 혹은 ‘불만족’의 일회성 평가로 끝나지만 좋은 기분과 감정을 남기는 물건은 오래 기억 속에 남아 누군가에게 또 선물하고 싶은 특별한 가치가 된다. 고객이 브랜드의 앰버서더가 되는 것이다. 브랜드는 어떻게 선물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솝Aesop은 고객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솝은 미국과 유럽 매장에서 선물 세트를 구매하는 고객에게 스콧 피츠제럴드, 알베르 카뮈 등의 책을 선물했다. ‘제품 사용 한 달이면 피부가 개선된다’는 문구 대신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그럼으로써 행복을 느껴 피부도 좋아진다는 믿음으로. 아마도 이솝은 고객이 크림 한 스쿱을 떠 피부에 바를 때마다, 그리고 선물 받은 책을 넘기고 덮는 매 순간 이솝과 함께한다는 감정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어떤 기억과 의미를 남길 것인가
향수는 더 이상 어떤 향이 더 좋은 향인가를 가지고 싸우기 어렵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향수 ‘Replica’는 향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판다. 모로코에서의 첫 아침, 할머니 집의 오후 햇살처럼. 향과 함께 Replica가 들려주고 싶었던 그 순간의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파텍 필립은 “당신은 파텍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음 세대를 위해 보살필 뿐이죠.”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만드는 것은 시계 그 이상의 시간이자 아름답게 이어지는 유산이라는 의미를 선물한다. 고객은 럭셔리를 구매하는 경험을 넘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시간을 선물 받는다.
한 사람을 위한 헌사의 언어로
서로를 길들이며 특별한 관계가 된 어린왕자와 사막 여우의 이야기처럼.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것에 이름을 붙여 주자 나에게로 와 의미가 된 김춘수 시의 ‘꽃’처럼. 제품과 돈의 거래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의미로 연결될 때 비로소 브랜드가 된다. 하루에도 수 십개의 브랜드가 쏟아지는 시대, 고객과 의미있는 연결감을 갖지 못하는 브랜드는 파도에 휩쓸리기 쉽다.
브랜딩은 결국, 관계의 기술이다
가격을 넘는 가치, 기능을 넘는 감정, 소유를 넘는 연결. 선물은 물건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감정을 건네는 것이다. 브랜드도 그러하다. 팔기보다 관계 맺기를, 공감과 공명을 남기는 경험을 중심에 둘 때 비로소 브랜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선물’로 남는다. 우리는 선물을 할 때 수십, 수백명을 떠올리며 준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브랜드도 제품을 만들고 이를 전할 때 이름 모를 다수가 아닌 그것을 받고 기뻐하며 자신의 일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갈 한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 사람을 위한 헌사의 언어는 선물의 기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고마움의 감정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는, 누구에게 어떤 감정을 선물하고 있는가?
*본 아티클은 2025년 THE LUXURY 매거진 5월호에 기고한 스페셜 아티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