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젠트라와 고양이 누리를 보내며
2006년과 2007년, 연달아 내 삶에 들어온 것들이 있다.
파란 젠트라와 나의 고양이 누리.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묘하다.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에 만난 이들을 서른여섯에 보내게 되었으니까.
아버지가 주신 파란 젠트라를 처음 받았을 때, 나는 그 차가 19년을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열여덟에게 19년은 평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19년은 생각보다 짧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지나갔을까?
차를 가진 학생이 드물던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디자인 준비물을 사러 시내를 돌아다니고, 방학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젠트라는 함께였다.
대학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서도,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내 차였다.
와이프 운전연수까지 시켜준 고마운 차.
누리는 그다음 해 여름에 왔다.
젠트라를 타고 대전의 한 가정집에서 데려온 샴고양이.
기숙사에서 몰래 키우다가 본가에 맡겼다가, 대학원 때 다시 데려와서 키웠다.
밤늦게 과제를 하고 돌아오면 항상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누리.
혼자 사는 청년에게 그보다 고마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젠트라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5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서기도 하고, 보닛에서 하얀 증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올해만 더, 조금만 더"를 외쳤지만, 가장으로서 안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누리는 작년에 먼저 갔다.
동생네에 맡겨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급히 비행기표를 끊었지만 하루 늦었다.
살아있는 누리는 못 봤지만, 화장할 때 편지는 읽어줄 수 있었다.
가끔 맥북에서 누리 사진이 갑자기 뜰 때면 여전히 마음이 저린다.
사람들은 "이제 놓아줄 때가 됐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19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애착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젠트라와 누리를 보내면서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이. 애틋하면서도 감사하고, 서운하면서도 기대된다.
어쩌면 이것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복잡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19년. 내가 열여덟에서 서른여섯이 되는 동안 젠트라와 누리는 늘 함께 있었다.
변한 것은 나였고, 그들은 변하지 않는 오래된 일기장 같은 존재였다.
이제 그 일기장을 덮어야 한다.
무서우면서도 궁금하다.
새로운 페이지 없이도 내 이야기를 계속 써나갈 수 있을까?
어쩌면 진정한 소유는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니라, 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직은 서운하고 아쉽지만, 언젠가는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9년 동안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