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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노hyono Mar 19. 2020

책 표지가 자유를 의미할 적에

바이마르 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

본 시리즈는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 권위자인 스티븐 헬러가 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기획했습니다. 기사 번역과 브런치 게재를 허가해주신 스티븐 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색 단락은 본문 이해를 위해 제가 직접 채워넣은 부연설명이나 추가정보입니다. 원문과 구분하기 위해 인용문 외엔 '-합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자유가 보장된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에서 책 디자인이 꽃 피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14년 역사는 정치 문화적 격동기였다. 1차 대전으로 독일제국은 도산했고 군대에 동원되었던 수많은 성인 장정이 죽었다. 패망한 독일 제국의 잿더미에서 독일 최초의 민주정부와 이에 극렬히 맞선 정당(나치당)이 동시에 탄생한다. 아무튼 잠시나마 언론 출판에 대한 검열은 줄었는데, 책 수집가 위르겐 홀슈타인Jürgen Holstein은 얼마 전에 이 때를 두고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주의자와 특히, 좌파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새로운 집단은 항상 새로운 이념을 갖고 느닷없이 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는 이런 생각을 주제로 원래 <블릭팡Blickkfang, 눈을 사로잡는 것이란 뜻>이란 제목으로 한정 출판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The Book Cover in the Weimar Republic>를 저술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정치 집단 간에 격렬한 언쟁이 잦았던 탓에 홀슈타인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에서 바이마르 공화국를 언급하며 “1차 대전 이후—전쟁 후 또 다시 전쟁”이라 말한다.

(1) 1차 대전에서 독일 제국의 패전이 확실해지던 중 1918년에 11월 혁명이 일어나며 독일제국이 무너집니다. 그 후 1919년에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필두로 가톨릭 중앙당Zentrumspartei, 독일 민주당DDP 세 정당이 주도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같은 해 'NSDAP', 즉 나치당이 등장합니다.
(2) 1919년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은 19세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근대헌법 중 처음으로 개인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며 인간다운 생존권을 보장하는 사회국가적 면모를 띱니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헌법은 2차대전 이후 20세기 현대 헌법의 전형이 됩니다.
독일의 1차대전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 체결, 1919
좌: <블릭팡Blickfang>, 2005 / 우: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The Book Cover in the Weimar Republic>, 2015


위르겐 홀슈타인은 1919년부터 1933년의 독일 도서 출판과 1000여가지가 넘는 책 표지, 책가위를 다루며 삽화가 풍부히 들어간 80가지 항목을 “인기있는 주제hot topics”라고 일컫는다. 여기엔 성평등, 낙태, 어린이 보호 이슈,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예술과 예술가에 관한 서적, 비행과 여행, 미국과 러시아, 스포츠와 건강, 어린이 책 등 여러 주제가 있는데, 이는 오늘날 언론사가 기사를 다루는 방식과 소름 돋을 정도로 같다. 그 시대 가장 독창적인 책 디자인은 좌파 혹은 자유주의 출판사에서 나왔다. “출판사 설립자는 주로 젊은이였습니다.” 홀슈타인이 말했다. “출판계에 발 들이고 몇 해를 넘겨 버틴 젊은이도 간간이 있었지만 나중엔 나치당의 탄압으로 그만두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물가상승과 대공황으로 재정이 따라주지 못해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홀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당시엔 “보수적인 출판인은 구리고 철 지난 디자인을 할 거란 시선이 있었기에” 젊은 출판인에게 책 표지 디자인을 할 기회가 주어질 수 밖에 없었다.

1929년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대공황이 발생하자 독일 노동인구 44%가 실직하고 경기가 심각하게 침체됩니다. 이에 1932년 '일자리, 자유, 그리고 빵Arbeit, Freiheit und Brot'이란 표어를 내걸었던 나치당이 선거에서 제1당이 됩니다. 1933년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의회를 해산하고 1934년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스스로 총통Führer 자리에 올라 독재 정권의 기틀을 완성합니다.


이 시기에 독일 소설 책 디자인이 쏟아져 나왔던 현실적이며 상업적인 이유가 있다. 울슈타인Ullstein, 모세Mosse, 셰를Scherl 같은 신문 출판사는 인쇄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출판물 목록에 삽화가 들어간 신문과 잡지도 추가하게 된다. 그리고 도서출판 부서를 신설했는데 신문사가 신설한 도서출판 부서는 기존 도서 출판사와 경쟁해야 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이 당시 상업 예술가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책가위와 책 표지를 디자인해 달라는 일거리가 주어졌는데,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마케팅 부서의 관리 감독을 받는 오늘날 디자이너와 달리 간섭 없이 자유롭게 디자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폴 레너Paul Renner, 얀 치홀트Jan Tschichold, 프리츠 헬무트 엠케F.H.Ehmcke, 에밀 루돌프 바이스E.R.Weiss, 에밀 올릭Emil Orlik, 조르주 마테G.A.Mathéy 등 유명한 상업 예술가가 이끄는 권위 있는 그래픽 예술 교육기관에서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나왔으며 이들은 주로 베를린, 라이프치히, 뮌헨에서 활동했다. 당시엔 다른 작품에서 특정한 양식을 베껴오는 걸 오히려 장려했다. 홀슈타인은 그 당시엔 어떤 기준이 되는 양식은 없었다고 말하지만, 1900년 즈음 유겐트스틸(아르누보) 양식이 유행했던만큼 근대적인 기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당시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모든 방법을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사이 어떤 양식이 실험에 성공했는지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죠.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 표현주의Expressionism, 자연주의Naturalism, 추상화Abstraction가 등장했고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독일에선 여기저기서 사진과 꼴라쥬를 광범위하게 활용했지요. 그리고 ‘모던’하게 디자인 한 좌파 정치 문학 서적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쏟아져나오기도 했습니다.”

독일 모더니즘의 모태가 되는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발터 그로피우스가 세우며 나치독일이 선포된 1933년까지 바이마르 민주 공화국과 역사를 같이 합니다. 스티븐 헬러가 사용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디자인에 '자유-실험-모던'이란 상징 체계를 부여하는 이유는 여기에 기인합니다.
유겐트스틸(혹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디자인 한 책 표지


이런 근대주의 작가는 자유롭고 느슨하게 연대하곤 했는데,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당시에 배를 곯지 않기 위해 프리랜스 디자이너가 된 독립예술가였다. 막스 벡만Max Beckmann, 한스 벨머Hans Bellmer,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루돌프 슐리히터Rudolf Schlichter,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등 거장들도 같은 이유로 독립예술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정 출판사와 제휴를 맺었던 당시 가장 저명한 책 디자이너 혹은 삽화가 중에는 허버트 바이어Herber Bayer, 게오르그 살터Georg Salter,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얀 치홀트Jan Tschichold,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한스 마이드Hans Meid, 프리츠 헬무트 엠케F.H.Ehmcke, 에밀 루돌프 바이스E.R.Weiss 등이 있다. 이 중 몇 명은 영국과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이주하고서도 줄곧 책 표지를 디자인했다.

좌: <100%>, 존 허트필드John Heartfield / 우: <예술창작과 경험Kunstschaffen und Kunsterleben>, 윌 파버Will Faber
좌: <유곽Bordell>, 세자르 클라인Cesar Klein / 우: <운전자 잭Jack der Autschlitzer>, 한스 벨머Hans Bellmer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가 처음부터 아예 모음집으로 기획된 건 아니었지만, 10여년 넘게 수집한 자료로 만든 만큼 굉장한 모음집이 되었다. 이에 홀슈타인도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책을 모으려고 모았다기 보다, 저와 제 아내는 여러 도서 전시회에 평범한 방문객이자 주최자로서 참가하며 다양한 이유로 저희의 관심과 이목을 끌었던 책을 구매해왔을 뿐입니다.” 현재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는 베를린 중앙주립도서관Zentral-und Landesbibliothek Berlin에서 보관 중이다.

위르겐 홀슈타인이 수집한 장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 수집한 자료를 다루는 광범위한 접근법은 여러 지점에서 흥미롭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만들어졌던 소설과 비소설, 예술 서적, 교과서, 어린이 책의 표지와 책가위가 어땠는지 보여주는 책으로는 최초이다.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 14년간 10가지 주제로  표지를 수집한 기록이 담겨 있긴 해도, 출판과 디자인계 석학들이  주제별로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책을 만든이는 누구인지전문가의 시선으로 알려주는 역사적 기록 같은  조금도 없다. 그런데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책표지> 수록된 책들이 세계대전 때부터 오늘날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정도다.




<책 표지가 자유를 의미할 적에> 마침


차현호

현 에이슬립 BX 디자이너

전 안그라픽스 기획편집자&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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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주), 공업디자인(부)

디자인 분야 전반을 짚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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