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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덕 Mar 09. 2024

다음

다음


23년의 다음 24년이 온다.

겨울의 다음 봄이 온다.

3월의 다음 4월이 온다.

오늘의 다음 내일이 온다.

사랑의 다음 이별이 온다.

그리고,

삶의 다음 죽음이 온다.


아니, 아니다.


한 해의 다음 한 해가 온다.

계절의 다음 계절이 온다.

달의 다음 달이 온다.

오늘의 다음 오늘이 온다.

사랑의 다음 사랑이 온다.

그리고,

삶의 다음 삶이 온다.






지인의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과 1~2개월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 건강하고 활기차셨다고 하는데 갑작스런 병환으로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시더니 급기야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신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들은 급작스레 달라진 어르신의 모습에 놀라며 저마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나는 지인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마땅히 건넬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묵묵히 그의 이야기만 들었다.

집에 돌아와 그의 이야기와 수척해진 그의 아버님을 생각하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또 가까운 친척들의 임종이 떠올랐다. 한때는 건강하고 생생하게 살아가다 어느 순간 삶의 다음으로 넘어가신 분들. 떠들썩한 생명의 소리 대신 이제는 조용한 침묵으로 가끔 나타나 내 기억에 머물다 가시는 분들.

어찌 보면 삶이란 게 참 허망하다. 성공과 열정과 노력도 종국엔 사라지고 미움과 분노와 슬픔도 흩어져 없어진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것뿐.

죽음의 문턱을 몇 차례나 넘나든 벗은 언젠가 내게 이렇게 얘기했다.

'막상 죽음이 찾아오면 사람은 정신없이 가는 거야. 어떤 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빠르게 사그라들어가. 그러니 할 말이 있다면 살아있을 때 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살아있을 때 해야 돼.'


자리에 누우신 지인의 아버님이 며칠 전 빠져가는 생기를 붙들고 자식들에게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평생을 '사랑'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셨던 옛날 분이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님의 말을 들은 자식들이 눈물을 흘린 건 당연하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종종 상대의 태도에 화내고 슬퍼하고 분노하며 서운해한다. 때때로 마음에도 없는 심한 말을 내뱉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은 아닐 것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 심한 말을 하는 것은 다만 두려움의 표현일 뿐 마음속 내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본래의 마음은 사랑이다. 모든 것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가만히 떠올려보면 내가 누군갈 미워하고 상처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본성은 고요함이다. 두려움과 분노는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일 그것들은 결국 흙탕물이 가라앉듯 가라앉고 결국 평온함만 남게 된다. 평온함은 따뜻함을 품고 있어 성질 그대로 그저 조용히 퍼져나갈 뿐이다. 어떤 조건도, 어떤 바람도 없이. 사랑은 그런 따뜻함이다. 조건도 바람도 없이 그저 전해지는. 그래서 마지막이 다가올 우리가 남길 말은 이것뿐이 아닐까 한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미 떠나간 내 가까운 이들이 침묵으로 가끔 기억에 찾아올 때 나는 그들에게 '사랑해요'라고 조용히 말하곤 한다. 그들이 살아있을 땐 하지 못했던 말. 그래서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진 말을 그렇게나마 내뱉어 본다. 물론 대답은 없다. 그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니. 그래도 상관없다.

나도 언젠간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정신없이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그때 내가 바라는 건 다만 내 마지막 날숨이 따뜻했으면 하는 것이다. 내 마지막 날숨의 조그만 온기가 공기 중에 흩어져 퍼져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흩어져 퍼져나간 작은 온기는 공기 중에 떠돌다 흙에도 내려앉고 꽃에도 내려앉으며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 삶의 다음은 작은 날숨의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형태는 다르지만 그것 역시 삶일 것이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진 모르지만 그렇게 삶의 다음엔 삶이 있을 것이다.







작가명을 '파람'에서 '고덕'으로 바꾸었습니다.

'고덕'은 '고맙습니다'와 '덕분입니다'의 앞글자를 딴 말입니다.

제가 작가명을 '고덕'으로 바꾼 건 그런 마음을 늘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마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서 부족한 것을 원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소란스럽고 정신없으며 종종 나의 불안을 남 탓으로 돌리곤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덕'의 마음을 되새기며 조금이나마 세상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변해갔으면 하는 바람 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작가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새 봄, 모두들 따뜻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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