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그리스의 보석 같은 섬
그리스에는 산토리니, 미코노스 만 있는 것이 아니다. 6,000여 개가 넘는 섬들이 그리스 반도를 둘러싸고 있다. 각각의 섬들은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 이드라(Hydra)는 에게 해의 빛나는 보석 같은 섬이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2시간 정도 페리를 타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이드라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이드라는 작은 섬이지만 19세기 선박산업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를 누렸다. 그리스 독립전쟁에서는 150척 이상의 선박을 공급하며 오토만과 맞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런 배경으로 한때는 ‘작은 영국’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드라의 역사를 주섬주섬 늘어놓는 이드라 사람들의 눈빛에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그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드라의 시간은 멈춰있다. 차도 고층 빌딩도 없다. 구불구불 돌길로 이어진 골목길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전통 건물들로 채워졌다. 사람과 당나귀만이 그 좁은 골목길을 지나간다. 자동차, 오토바이 등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이동수단이 금지된 이곳에서 당나귀는 유일하게 육로를 이동하는 교통수단이다.
복작거리는 아테네를 벗어나 이드라에 도착하니 페리가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침이면 닭이 우는 소리 혹은 당나귀가 지나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숙소를 나서면 섬의 주인인 것처럼 위세 등등한 고양이들과 골목에서 마주쳤고, 마을 사람들과 아침인사를 나눴다. 한때는 인구수가 2만 8,000여 명 가까이 되었지만 현재는 이드라 타운을 중심으로 2,000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남아있다. 작은 마을에 많지 않은 인구. 친구 사귀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스스럼없이 길목에서 자주 마주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었다.
이드라에서의 일과는 특별하지 않았다. 이드라 타운의 앤티크 한 골목길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드라의 역사와 전경,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면 라자로스 쿤두리오티스 히스토리컬 맨션(Lazaros Koundouriotis Historical Mansion)으로 향하면 됐다. 라자로스 쿤두리오티스는 성품, 재력, 정치적 능력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인물로 그리스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곳은 그가 살던 자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18세기 전형적인 이드라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은 높은 언덕에 위치해 눈에 쉽게 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루프 테라스에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원한 바다 풍경과 붉은 벽돌색 지붕들이 옹기종기 조화를 이룬 소박한 이드라 타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바라보았다. 박물관 내부에는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사용했던 무기류, 과거 그리스인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가구, 전통 의상, 세라믹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한적했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꼼꼼하게 살펴보며 한때 잘 나갔던 위풍당당한 이드라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에메랄드 빛 바다를 눈에 담고 싶으면 해변가를 따라 걸었다. 이드라 타운에서 가장 가까운 스필리아(Spillia)를 시작으로 플라케스(Plakes)까지.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나무로 둘러싸인 암벽 사이에 있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과 "칼리메라(Kαλημέρα)" 인사를 건넸다. ‘칼리메라’는 그리스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이드라 타운도 조용한 곳이었지만 마을을 벗어나니 그 정적함이 극에 달했다. 주위에는 산과 바다, 자연뿐이었다. 그 풍경화 같은 장면에 살며시 스며들어갔다. 외롭다기보다는 평화로웠다.
걷는 것이 지겨워지면 당나귀를 타고 마을 위쪽을 거닐었다. 당나귀를 탈 때면 최대한 당나귀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무게를 잘 분배하고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당나귀는 이드라 사람들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다. 무거운 짐을 나르기도 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돕기도 한다. 그리고 당나귀 체험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좋은 여행 상품이기도 하다. 당일치기로 이드라에 들린 여행자들이 꼭 경험하고 가는 것이 당나귀를 타는 것이다. 운치 있는 이드라의 모습이 당나귀를 타고 둘러보면 더 특별해지는 까닭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열심히 일한 후에 쉬고 있는 당나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버 뷰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페도 카푸치노(Feddo Cappuchino, 차가운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은 이드라를 게으르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책을 봐도 좋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재미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이드라의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카페에 앉아 거품 가득한 페도 카푸치노를 한 입 머금으니 행복감이 저절로 몰려왔다. 시간이 멈춘 이 곳, 이드라에서만 허락된 여유 같았다. 때로는 많은 것을 보고 바쁘게 흘러가는 여행보다는 그 사이의 쉼표가 더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