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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Dec 22. 2020

우애의 온도-<아웃 오브 더 퍼니스>

크리스찬 베일 영화를 단 한편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이 영화.

이 배우가 아역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열세살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에서 주연을 맡았고 <작은 아씨들>에 함께 출연했던 위노나 라이더의 개인비서 시비 블라직과 결혼했다. 영국인이지만 미국인의 억양을 완벽히 구사하고 201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극단적인 체형변화나 덥수룩한 수염의 유무마저 그의 잘생김과 깊이 파인 눈에 담긴 영혼과 무게감에 영향을 줄 수 없으니. 오, 크리스찬 베일의 이야기다.     


크리스찬 베일을 처음 본 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에서였다.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주인공이 힘을 회복하는 서사구성은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의 서사구성에서 가져왔으며, 영화의 제목은 구약 성서의 한 부분과 같다. 모세스(크리스천 베일)가 역경을 이겨내고 이집트의 노예들을 이끄는 모습은 막시무스의 콜로세움 격투보다 처절했고 파도에 맞서 람세스와 격돌하는 장면은 막시무스가 코모두스와 칼을 맞대는 장면보다 치열했다. 이는 명백히 <글래디에이터>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다. 당연하다. 두 영화의 감독이 모두 리들리 스콧 한 사람이었으니.     


<글래디에이터>(2000)(좌)와 <엑소더스:신들과 왕들>(2014)(우)

크리스찬 베일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당연히 명작 아니냐며 <배트맨> 트릴로지를 눈 앞에 들이댈 수도 있고 연기를 향한 이 배우의 육체노동을 기억하라며 <머시니스트>를 내놓을 수도 있다. 모두 재밌고 좋은 작품이기에 이런 질문은 언제나 곤란하다. 하지만 그가 나온 영화들 중에서 단 한편만 지인과 같이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답은 쉬워진다. 나는 곧바로 <아웃 오브 퍼니스>를 고를 것이다.



<아웃 오브 더 퍼니스>에서 조 샐다나(좌)와 크리스찬 베일(우)


결코 쉽지 않은 삶


스콧 쿠퍼 감독의 <아웃 오브 퍼니스>는 서사구조가 뚜렷한 영화다. 너무 뻔해서가 아니라 인물의 설정과 갈등관계, 주변인들이 태도가 뚜렷하고 장소와 조명의 배치의도가 명확해 영화의 흐름을 예측하면서 전 장면을 되감아 생각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마치 도로를 주행하다 종반부라는 빨간불 앞에 잠시 정차한 우리에게 이 영화의 결말은 예측 가능하지 않고 다소 흐릿하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한다.     


러셀은 공장의 용광로에서 일한다. 아버지부터 이어온 일종의 가업이다. 동생 로드니는 이라크 파병 군인이다. 형제의 우애는 든든하고 뜨겁다. 러셀은 아픈 아버지와 일종의 도박병에 걸린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사랑하는 애인과의 미래를 그린다. 어느 날 러셀이 교차로에서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범해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많은 일이 발생한다. 아버지의 부고소식과 출소 이후 로드니가 길거리 맨주먹 격투판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출소를 기다리던 애인이 결국 변심했음을 차례로 접한다. 하지만 러셀은 무너지지 않는다. 슬픔에 잠식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심한다. 그러던 중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을 거라는 소식과 함께 동생 로드니가 실종된다.     


<아웃 오브 더 퍼니스>에서 크리스찬 베일(좌)과 케이시 애플렉(우)


영리한 컷 편집, 용광로-우애의 온도.

<아웃 오브 퍼니스>는 장소와 조명(빛)의 밝기, 동시간대 벌어지는 사건을 번갈아 보여준다. 먼저 러셀이 삼촌과 숲 속으로 사냥을 나가는 장면은 로드니가 빚쟁이 존 페리와 산 속 맨주먹 싸움 장소에 찾아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러셀이 사슴에게 총을 겨누다가 거두는 장면은 로드니가 싸움에서 구타당하는 장면과 대조된다. 삼촌이 사냥한 사슴의 피를 빼고 해체하는 장면은 할란에게 존 페리와 로드니가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러셀과 데그로트가 존 페리의 어두운 사무실 안 붉은 조명 아래 처음 마주한 채 가벼운 시비를 나누는 장면조차 며칠 뒤 러셀이 데그로트를 사냥하는 아침과 대조된다. 뚜렷하고 영리한 전략으로 긴장감을 높인다.     


이 긴장감은 앞으로 꺼져갈 운명의 용광로처럼 마지막으로 불타오른다. 동생을 찾아다니던 러셀은 애팔래치아 산맥의 맨주먹 시합에 나갔던 동생이 시합에 동행했던 사채업자 존 페리와 피해를 당했음을 확인한다. 러셀은 당장 수사를 원하지만 주 관할권 문제와 애팔래치아 산맥 속 ‘라마포’ 지역 조직의 악명 탓에 애팔래치아 지역 경찰들조차 수사를 꺼려한다. 시간만 흘러가던 중 동생 로드니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범인이 존 페리를 죽였던 ‘라마포’지역 조직의 우두머리 할란 데그로트라는 남자라는 소식을 듣는다. 러셀은 슬퍼하는 대신 홀로 할란 데그로트를 사냥하기로 결심한다.     


용광로는 단 십일만 정지되어도 재가동되는데 수개월이 걸린다. 우리 삶 속에서도 한번 단념했던 결심을 다시 재기하려면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러셀은 자신의 결심이 고개를 숙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경찰도, 주위의 지인들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셀의 할란 데그로트 사냥에 머뭇거림은 필요없다. 이전에는 사슴에게서 총구를 내렸으나 이번에는 다르리라. 


'라마포'의 할란 데그로트(우디 해럴슨)(좌)와 그를 추적하는 러셀(크리스찬 베일)(우)


비합리적인 세상 속 러셀을 응원하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이미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살인 전과가 있는 러셀이다. 교차로에서 차량이 갑자기 튀어나왔지만 그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러셀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교도소에 다녀왔다. 만약 러셀이 데그로트를 살해한다면 그의 앞날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러셀과 그의 지인인 경찰 역시 이를 안다.      


경찰이 뒤늦게 쫒아와 총상을 입은 데그로트를 쫒아가는 러셀을 만류한다. 경찰이 데그로트를 처리할 테니 제발 그 총 내리라고 한다. 경찰인 자신에게 맡기라고 설득한다. 러셀은 잠시 숨을 고른다. 하늘을 보니 낮이 지나고 저녁이 오고 있다. 더는 기다릴 이유가 없어서인지, 러셀은 곧바로 데그로트에게 총을 쏜다.  

 

누군가는 러셀이 앞으로 불행해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인 아버지와 동생은 죽었고 애인마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었다. 일하던 공장은 폐쇄를 앞두고 있다. 그렇기에 또 다시 사람을 죽인 러셀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여기거나 이제 그의 인생은 끝났다며 혀를 찰 수도 있다. 혹은 차라리 경찰에 넘기고 남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행복하게 누릴 순 없었겠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러셀을 만류하는 경찰 웨슬리(포레스트 휘테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출소 이후 자신이 사고를 낸 장소에 꽃을 들고 간 러셀처럼,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할 줄 알고 인간으로써 양심의 온도가 식지 않은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기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깜냥을 책임지려 한다. 그것이 다섯 시간이나 다섯 시간 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요구하더라도 말이다. 난 러셀이 용광로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복수와 책임의 결단을 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앞날이 흐리거나 차가워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책임질 건 책임지고 반성하며 결단력 있는 그의 태도에 안심했다. 난 이 캐릭터를 언제나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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