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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Nov 22. 2020

<언컷 젬스>는 아담 샌들러의 픽션 다큐멘터리다.

지긋지긋한 지옥도 속 한줄기 빛, 영화에만 있지 않다.

 최악의 순간들이 있다. 지금이 지나간다면 다시는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으리라,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기도하는 순간들 말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손님에게 갑질을 당했을 때, 녹초가 된 몸으로 귀가해 현관에서 대자로 퍼질러졌을 때, 호르몬의 분출로 야밤을 몸부림치며 홀로 보냈을 때, 하물며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나는 느꼈다. 최악이다 진짜. 각자 경험이 다르겠지만, 대개 비슷한 양상을 그렸으리라 확신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깔아뭉개곤 했다. 그 시간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며 안 되는 사람이라거나, 혹은 이 집단에서 내가 있을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성립될만한 긍정적인 상황도 떠올렸지만 항상 귀결되는 결론은 같았다.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주변인 모두를 불행으로 질식시킬 만큼 이렇게 부정적인 나조차도 무릎을 꿇게 된, 가장 최악의 순간에 처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넷플릭스'영화  <언컷 젬스> 속 하워드 래트너(아담 샌들러)

  하워드 래트너는 뉴욕에서 투잡을 뛴다. 보석상 그리고 채무자. 빚을 빚으로 돌려막고 스포츠 배팅으로 갚아 뉴욕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절반이 그의 채권자다. 이 인간이 얼마나 답이 없냐면 아내의 오빠마저 자신의 채권자다. 이 상황에서 하워드에게 택배 하나가 도착한다. 하워드는 신이 난다. 택배를 열어 생선 배를 갈라 블랙 오팔 원석 하나를 꺼내들고 숭배한다. 니가 나를 부자로 만들어줄 물건이구나. 어이구 내 돈덩어리! 이걸 경매에 넘기면 빚을 청산할 수 있다. 그는 서둘러 경매계획을 세운다.     


  와중에 불청객이 등장한다. 하워드의 중개자 드마니가 데려온 농구선수 케빈 가넷 역시 블랙 오팔에 매료된다. 그는 이 원석이 자신과 함께할 운명이라고 확신한다. 하워드가 가넷은 갈등한다. 하워드는 원석을 경매에 붙여 빚을 갚으려 하고, 가넷은 전성기가 지난 자신의 농구인생을 원석의 힘으로 다시 한 번 실력을 만개하고자 한다. 결국 가넷의 우승반지를 담보로 하워드는 원석을 가넷에게 빌려준다. 이후 하워드를 기다리고 있는 건 빚쟁이들로 가득찬 지옥도다.     


  규율적이고 정석적인 ‘기-승-전-결’단계와 사건을 과녁에 걸고 해결하려 직진하는 영화가 있다. 반면 전통적인 영화 내러티브의 관습을 무시하고 감독의 개성을 영화에 주입해 관객의 정신을 흔들어놓는 영화가 있다. 샤프디 형제의 <언컷 젬스>는 후자의 영화다.      

하워드 래트너(아담 샌들러)와 줄리아(줄리아 폭스)

  사프디 형제의 <언컷 젬스>의 리듬은 숨가쁘다. 가넷에게 빌려준 원석을 돌려받으려는 하워드의 분투를 빠른 호흡으로 연주해 몰아쳐간다. 아 과정에서 전혀 관계없는 인물과 상황이 정신없이 하워드를 방해한다.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하워드의 노력은 직선 대신 지그재그를 그린다. 채권자에게 욕을 내뱉으며 뿌리치고 원석을 돌려받으려 드마니를 따라가지만 따돌려지고, 그 와중에 불륜관계에 있던 여직원의 바람을 의심하고 욕을 내뱉으며 싸운다. 욕과 욕이 오고가고 그 사이 다른 쌍욕이 끼어들어 형성되는 이 난장판은 1분을 넘기지 않는다. 이 소음은 역으로 저들의 관계를 파악하게 한다.     


  <언컷 젬스>가 발하는 빛의 8할은 하워드 래트너를 연기한 아담 샌들러에게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가장 망가져있는 코미디 영화로 8할을 구성된다. 한 사람이 특정 장르에 꾸준히 출연하는 건 ‘특화되어 있다’라는 칭찬과 ‘정형화되어 있다’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아담 샌들러는 그 비판을 정통으로 맞았다. <대디 보이>에서 한 번 망하고 <코블러>로 재기를 노리다 다시 망하고 <픽셀>에서 십자인대와 아킬레스건이 모조리 끊어졌다.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나마 유태인이라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 될만큼 그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런 그에게 ‘넷플릭스‘가 손을 내밀었다. “너, 나랑 장사 한번 하자”. 아담 샌들러는 주연, 제작, 각본을 모두 맡은 <샌디 웩슬러>로 ‘넷플릭스’에서 다시 일어섰고,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제대로 고른 신작)>이 호평을 받으며 굽은 허리를 폈다. <샌디 웩슬러>와 <마이어로위츠 이야기>가 워밍업이었다면, <언컷젬스>는 100미터 전력질주였다. 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영화 <킅릭>

  나는 아담 샌들러를 프랭크 코레치의 <클릭>에서 처음 봤다. 아마 대다수가 비슷할 것이다. 무슨 저렇게 더러운 개그를 하는 사람이 있나, 그게 또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 언제나 균형있게 튀어나온 윗배와 아랫배, 세월에 맞춰 흘러내리는 얼굴의 주름, 그리고 능청스러운 눈빛, 호흡처럼 자연스레 나오는 욕설까지. <리디큘러스 6>,<워터보이>,<블렌디드>,<웨딩 싱어> 등 코레치와 함께 한 작품이나 <롱기스트 야드>, <첫 키스만 50번째>, <성질 죽이기> 등 피터 시걸과 함께 한 작품들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하지만 역시 그의 진가는 혀를 내밀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상대를 조롱하거나 지저분한 성적 농담을 나불대는 모습보다는, 얼굴에서 웃음을 소각시키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습에서 나온다. <펀치 드렁크 러브>, <레인 오버 미>의 그를 보라. 완전히 무너져있어 자력구제가 불가능하기에 반드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피폐해진 그는 결국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자력구제를 이룬다. 가장 낙관적이고 천진난만한 사람의 가장 진지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위의 영화들을 보면 된다. 코믹한 이미지의 대척점에서 아담 샌들러는 그가 좁은 스펙트럼의 배우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언컷 젬스>의 아담 샌들러는 <펀지 드렁크 러브>와 <레인 오버 미>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답이 없는 삶에 잠식된 하워드에게는 가족이라는 생명줄이 있다. 같이 스포츠 배팅을 즐기는 아들을 제외하곤 딸과 아내는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혐오한다. 하워드도 이를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가족관계를 되돌리려 한다. 밖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지만 집에서는 고운말을 쓰려 노력한다. 딸에게, 아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말이다. 아담 샌들러는 이 인간군상을 훌륭하게 연기한다.     


  그러나 희망 섞인 상황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다. 그는 여전히 채권자들에게 쫒기고, 맞고, 협박당한다. 결국 기회가 찾아온다. 가넷이 원석을 들고 돌아온 것이다. 경매장에서 일련의 소란 끝에 원석을 팔지 못한 하워드는 가넷에게 원석을 팔아 현금을 챙긴다. 그동안의 빚을 청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이다. 순간 채권자들이 찾아온다. 하워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피폐한 주인공들은 항상 무언가에 쫓긴다. 상황을 타개하거나 모면하려 해봐도 안 좋은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들은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사회적 보호망 밖의 인물이거나 딱히 자신들을 아껴주고 사랑해 줄 사람들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아주 짧은 순간, 소음과 고함 그리고 피와 오물로 가득 차 앞이 컴컴한 이 같은 상황에도 단 한줄기의 빛이 있다.이 ‘한 줄기의 빛’은 <언컷 젬스>, <굿 타임>, <헤븐 노우즈 왓> 등 그들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한다.     

<언컷 젬스> 속 하워드의 아내 디나(이디나 멘젤)

  <언컷 젬스>의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영화가 거의 끝날 때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하워드 래트너의 부인 디나를 연기하는 이디나 맨젤이 하워드와 통화하는 부분이다.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하워드는 불륜녀가 아닌 디나에게 전화한다. 그는 채권자의 부하가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며 디나에게 얼른 집을 벗어나라고 한다. 두 번째, 그토록 하워드를 증오하고 혐오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디나가 채권자들에게 협박당하던 하워드의 모습을 떠올리곤 경찰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다. 이 두 장면은 가족애라는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비춘다.     


  모두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이제 망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마침내 혼자라고 생각해 나 자신을 놓아버리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조차 딱 한 명쯤은 나를 끝까지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지질한 모습과 최저의 모습, 또는 가장 한심한 모습을 모두 바라본 어떤 누군가일 것이다. 아니면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누군가일 것이다. 여러모로 힘든 시기다. 모두가 희망을 가져야 할 이 때, 가장 상투적이지만 가장 어울릴만한 한 마디를 하고 싶다. 가장 어두운 곳에도 한 줄기 빛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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