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로도 모임이 될수 있어요
크라잉넛의 경록 씨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한잔 하는 사이입니다. 경록 씨를 처음 만난 건 지구가 멸망한다던 음습한 기운과 모두 컴퓨터가 멈춰 버릴 것이라는 턱도 없는 루머가 돌던 1999년 서울대 운동장에서였습니다. 그때 전 음반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어떤 뮤지션 분과 계약하기 위해서 따라다니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경록 씨를 봤을 때엔 그의 나이는 이십 대 초반, 빨간 체크의, 스코틀랜드 킬트를 입고 있었답니다. 이미 그땐 크라잉넛의 팬이어서 대기실에서 훔쳐봤던 기억이 있어요. 경록 씨는 기억 못 하겠지만요. 그리고 8년쯤 후, 경록 씨와 제대로 한잔 할 날이 있었죠. 술에 취해 경록 씨와 노래방에도 갔었는데, 제 노래방 역사상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암튼 우리는 여차 저차 해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술을 마셔도 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 그날도 경록 씨와 오랜만에 한잔하던 날이었어요. 마침 푹 빠져있는 경북 칠곡의 신동 막걸리였지요. 신동 막걸리는 물과 쌀 만으로도 바닐라향이 향긋하게 올라와서 인간문화재가 만드신 유기 술잔에 마시면 그야말로 '이것이 풍류다'죠. 비도 왔고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12도의 100퍼센트 원액 한주전자로 시작했다가 두 주전자, 세 주전자가 되도록 마셨습니다. 유쾌한 경록 씨와 그야말로 유쾌한 술자리였어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지만, 경록 씨의 생일인 경록 절은 크리스마스, 핼러윈데이와 함께 홍대 3대 명절로 꼽히죠. 처음 갔을 때에는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의 숫자에, 놀랄만한 높이의 닭튀김에, 무엇보다 맥주가 줄어드는 속도에. 그 이후에도 몇 번 가봤는데 홍대에서 만나길 기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온다고 봅니다. 400명이 훌쩍 넘습니다. 400명이 넘는 생일 파티가 상상이 되시나요? 그날 소비되는 많은 술 중에서 맥주만 따져도 50만 씨씨라면 그 규모가 짐작되시죠? 신동 막걸리에 흠뻑 젖은 채로 경록 씨에게 말했어요.
'경록 씨 생일 파티 정말 재미있었다고 저도 그런 생일 파티를 해보고 싶었다고.'
여기서 잠깐! 제 생일 파티 규모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삼십에서 오십은 거뜬히 넘는 규모긴 합니다 매년 7월 엄청난 카드 값이 나가고 있어요.
암튼 제 부러움을 듣고 있던 경록 씨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나도 해요.’
전 경록 씨가 정말 부러웠나 봐요. 저희 회사는 공공기관이라 2년에 한 번 정도는 전혀 다른 팀으로 보내지곤 했는데, 그 무렵에는 스타트업 쪽, 그 전에는 음악, 패션에서, 더 오래전에는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그리고 미국사무소에서, 해외 연수 담당자로서 일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이분들이 서로 알고 지내시도록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그 언젠가가 바로 그날이었던 겁니다 봉화산 유기 주전자에 신동 막걸리도 마셨고요. 비도 오는 수요일이었고요. 연말이었고요.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분들을 한시라도 빨리 소개하고 싶더라고요
추진력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저는 대리로 집으로 가는 차 조수석에서 단체 방을 만들었고, 초대를 시작했습니다. 누르다 보니 생각보다 서로 알고 지내시면 좋을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초대 버튼을 눌렀습니다. 술에 취해 누르고 또 누르다가 집에 도착했고,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설핏 잠이 깼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뭔가 서늘했다고 할까요?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요. 몇 명을 초청했는지, 누구를 초청했는지 확인하기가 무서웠어요. 괜찮아, 괜찮아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어요. 불길한 예감은 커져 갔습니다.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어요. 새벽부터 메시지를 출현을 알리는 진동음으로 제 폰은 탭댄스를 추고 있었거든요 .
출근하면서 단톡 방을 열어보니, 거의 100분을 초청했더라고요. 엄청난 명단이 있더군요. 방금 대화방을 나가신 저희 본부장님을 발견했을 때에는 운전대에 머리를 박을뻔했어요. 원장님 전화번호가 주소록에 없었다는 작은 행운에 감사했습니다. 엄청난 명단엔 그저 한두 번 인사를 했을 뿐인 어르신들, 뮤지션들, 스타트업 대표님들, 자문회의에서 인사만 했을 뿐인 교수님들들이 있었어요. 허영만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엔 울고 싶었고요 술에 흠뻑 쩔은 제가 보낸 단톡 방 메시지는 "연말을 맞이하여 신동 막걸리를 마시는 모임을 곧 개최할 테니 다 같이 모이자' 였습니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문장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어요. 백명중에 이미 삼십 명은 방을 나간 후였습니다. 상당수가 저를 차단하셨을 거예요. 이해합니다.
저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경북 칠곡 신동 막걸리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사과하며 취소할까, 평소 행동거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해해 줄 거야 라고 마음 한편에서는 속삭였지만, 술에 취했어도 약속은 약속, 술에 취해 저지른 무모한 짓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막걸리 모임을 예정대로 열기로 결정합니다.
단톡 방에서 나가지 않고, 심지어는 '재미있겠다'라고 호응해주신 분들, 아마 사십에서 오십 명쯤을 초대해서 막걸릿집 이층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와 한두 번 봤을 뿐인 밴드 멤버들부터, 패션팀에서 만났던 패션 디자이너분들, 만화팀에서 만났던 만화가분들, 스타트업 대표님들, 오랜 친구들이 이 이상하고 급작스러운 모임에서 만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경록 씨 때문에 시작한 모임이었는데, 경록 씨가 왔는지 안 왔는지는 기억에 없어요. 저는 그날도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버렸거든요. 모임이 파하기도 전에 맛이 가서 택시를 탔습니다. 물론 계산은 마쳤고요. 그날의 카드 영수증은 인생의 교훈으로 평생 보관하려고 했었는데, 가만, 어디 있더라?
엄청난 송년회는 다들 재미있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지만, 십 년 만에 연락 끊긴 친구를 만난 분들도 있었다고 하고, 또 그 모임에서 뮤지션과 팬심으로 만난 어떤 커플은 그 이후로도 모임을 만들어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저는, 훗날 제가 애정 하는 두 모임, '정우성 독서클럽'과 '여러분 with위스키'의 멤버들을 구성했거든요.
돌아보면 한심하고, 웃기지만, 이런 실수로도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생각하면, 모임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니깐요.
* 사진은 엄청난 송년회에 인스피레이션을 주신 크라잉넛의 한경록 군, 경북 봉화산 유기에 담긴 칠곡 막걸리 원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