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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사 Feb 05. 2020

00. 피난일기 - 프롤로그

여행을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힙'한 병, 군발 두통 이야기

우리 부부는 이 년째 매년 겨울 따뜻한 나라에서 두 달가량을 보내고 있다. 2019년은 하노이, 2020년은 발리. 놀기 위하여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도 아니다. 굳이 이렇게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는 이유는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힙’한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렇다.  


그 이름은 바로 ‘군발두통.’ ‘군집성 두통’이라고도 부른다.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모르고 밝혀진 바도 없다. 아마 생소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나도 결혼하기 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병이었으니까. 그래서 아주 잠시만 설명충이 되려고 한다. 남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갑자기 누군가가 오른쪽 눈알을 못으로 앞뒤로 후벼 파는 느낌이 찾아오며 본격적인 전조 증상이 시작됩니다. 이 순간은 어느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서운 순간이죠. 곧 온몸에 땀이 흐르고, 한쪽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나옵니다. 이어서 뒤통수를  망치로 가격하는 듯한 극한의 고통이 느껴지며, 이런 상태가 10분에서 30분가량 지속되는 것이죠."  


그 고통의 수준은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물론 애는 아직 안 낳아봐서 얼마나 아픈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에 머리로 출산을 두 번, 운이 나쁠 땐 세 번씩 한다. 매 년 겨울마다 그렇게 아프다. 하도 심하게 아프니 죽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이 들어 그 별명이 ‘자살 두통’이다.      


문제는 치료약이 없다는 것. 치료는커녕 진통제도 잘 듣지 않는다. 일례로 급히 찾아갔던 신경내과에서는 머리에 뇌졸중 주사를 꼽아주었는데, 얼마 안 가서 발작이 오자 의사는 허둥지둥 프로포폴을 놔줬다. 하지만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아예 마취가 안 되었을 정도니까 정말 골 때리는 녀석이다.      


그 녀석을 처음 제대로 만난 건 바로 2009년이었다.      


“2009년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처음 전조증상을 동반한 제대로 된 그 녀석을 처음 만났죠, 엄숙한 화상회의 중이었는데 눈이 너무 아파서 그 자리에서 눈알을 뽑아 버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급히 큰 안과로 옮겨진 뒤 처음으로 병명을 알게 되었죠. 의사 선생님이 안과에서 치료할 병이 아니니 더 큰 병원, 또는 신경내과로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하셨습니다.”     


미사와 만나기 전 남편 윤건의 모습.

군발이 이 자식. 앞으로 편의상 이 놈을 군발이라 부르겠다. 물론 오해는 마시라. 군대와는 관련이 없고 군인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남편이 의장대에서 군 복무를 할 때 심심치 않게 구타를 당했고, 한 번은 뒤통수를 맞고 코피를 흘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해 겨울부터 두통이 시작된 것으로 우리는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 강도가 심하지 않았지만, 그놈은 남편이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었던 바로 20대의 어느 날 시한폭탄처럼 터져버렸다.


빵! 하고 말이다.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건 2015년 5월 5일. 소개로 만나 어쩌다 보니 7개월 만에 결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렇게나 확신이 들었던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약간 변태 같을지 모르겠지만 만나기도 전부터 그의 까칠함과 예민함이 좋았다. 보수적인데도 개방적인 이중적인 모습도 좋았다. 딱 개방적인 선비 같은 느낌이랄까.


큰 키에 마른 체구, 게다가 웃는 얼굴에는 의외로 아이 같은 순박함이 묻어있어 귀여웠다. 예로부터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답도 없다 하지 않았나. 우린 답도 없이 서로에게 빠져버렸다.


“흠흠, 저는 어두운 저와는 달리 밝은 미사가 좋았어요. 예쁘기도 했고요.”     


워워, 바퀴벌레 같은 한 쌍이 짜증 나겠지만 잠시만 참아주셨으면 좋겠다. 바로 다음 화에서 우린 싸울 예정이니까.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많이 생략된 것 같지만 너무 길어질 듯하여 차후 더 썰을 풀도록 하겠다. 미리 경고하지만 매우 흥미진진할 예정이다. 어쨌든 첫 만남부터 심하게(?) 눈이 맞은 우리는 같은 해 11월에 선 혼인 신고를 하고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2016년 1월 설 명절 즈음에 그놈이 남편의 머리를 두들기며 찾아왔다.


똑똑. 잘 살아계셨나요?  


아직도 생생하다. 그가 밤 새 끙끙 앓으면 옆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끔찍한 무력함에 시달렸던 첫 해 겨울. 꼬박 두 달을 그렇게 지옥과 같던 신혼을 보냈다. 그때 나는 공기업에서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밤 새 그렇게 진을 쪽 빼고 회사에 출근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치료법을 찾았다. 해외 논문도 읽어보고 좋다는 병원도 찾아보고 말이다.


이 기회를 빌어서 함께 고민해 주시고 신경 써 주신 기술지원팀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결혼 전 나와 윤건.

혹시 내가 사기 결혼을 당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을 위해 변명을 하나 하자면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에는 태국에서 오래 살았다. 다행히도 그때는 두통이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따뜻한 기후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군발이가 소멸했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들어온 차에 어떤 처자(미사)와 눈이 맞아 결혼을 했는데, 세상에 이 자식이 죽지도 않고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단언컨대 나는 남편이 이런 두통이 있는 걸 알았어도 결혼했을 것이다. 우리의 콩깍지가 얼마나 심했냐면 서로 팔다리가 하나씩 없어도 아무런 고민 없이 당장 결혼하자,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 내 아를 나아도!" (결혼 전 내가 남편한테 했던 말이다.)


그렇게 첫 군발이를 겪고 나서 가장 충격이었던 사실은 고통의 강도가 아니었다. 바로 회사를 포함한 그 주변 사람들이 지금껏 그의 두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가족들도 병명을 몰랐으니 말이다.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아마도 아직도 군발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군발 두통은 절대로 스트레스 따위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도 알 수 있다.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원래 그렇다. 남의 고통은 타인이 알기 힘든 법이니까. 인간은 원래 혼자다. (우린 둘이지만.) 그리고 알았다 하더라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크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동안 외로웠을 남편이 너무 불쌍했다.      


그해 겨울을 지나고 남편과 나는 내년부터는 웬만하면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에 나가서 살자는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2017년 겨울에도, 2018년 겨울에도 우리는 아무 곳도 가지 못했다. 심지어 2018년엔 평창올림픽에 통역을 하러 가는 바람에 남편은 한 달 넘게 두통을 고스란히 혼자서 겪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돌아와서 마주한 그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내가 돌아와서야 한참 지나고 곱창에 소주를 먹으면서 고백하더라. 그동안 끔찍할 정도로 죽고 싶었다고.        


그 날 같이 울고 우리는 약속했다.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외로 나가자, 굶더라도 나가서 굶자고 말이다.


그동안 나는 프리랜서로 전향했고, 남편이 시작한 사업도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2019년  1월 ~ 2월, 약 50일간을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은 약 40일 간 발리의 떼자쿨라(Tejakula)의 레스(Les)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쉽게 결정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겨울을 두 번이나 겪고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러한 삶은 절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남편의 군발이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힙’한 병이 되었다. 겨울에 하노이든 발리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병. 죄책감 없이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병. 어떻게 보면 비극이기도 한 우리의 피난 여정을 이 일기를 통해 기록하고자 한다. 기억력이 나쁜 내가 이 순간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리고 혹시 용기를 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발리에서도 매우 '힙'한 미사.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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