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불행에는 사랑받지 못한 어린시절이 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할래요"
이보다 더 슬픈 고소가 있을까. 우수에 찬, 무력한 눈동자이지만 한편으론 분노로 가득한 한 소년은 법정에서 부모를 옆에두고,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리 슬픈 기색이 없다. 부모를 고소하기 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을텐데, 눈물 한바가지를 쏟으며 어쩔 수 없이 법정에 설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연을 떠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참으며 얘기해야 마땅한 것 같은데, 이 소년은 마치 사기꾼을 고소하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모를 고발한다.
소년(자인)이 고소하기까지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이 이제 펼쳐진다. 12살 정도의 자인은 많은 동생중에서도 한살 어린 여동생(사하르)를 특히 더 아낀다. 지독히 가난한 자인의 아버지는 얹혀사는 건물주이자 식료품가게 주인인 아사드에게 사하르를 시집보낼 궁리를 하고, 자인은 생리를 시작하는 사하르에게 부모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하며 사하르가 아사드에게 팔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하지만 12살 소년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뺏아가듯 사하르는 집을 떠나게 되고, 얼마 안가 임신을 했지만 너무 어린나이라 결국 죽고 만다. 자인은 사하르가 죽은 것을 알고, 칼로 아사드를 찌르게 되고, 그 후 자인은 부모를 고소하기까지 이른다.
감독 라딘 라바키는 원래 법정 영화로 구성해 법정 씬을 더 많이 넣으려고 했단다. 하지만 결국 자인의 삶에 더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자인의 삶 세세한 부분을 묘사해 다뤘다. 라딘 감독이 법정 영화로 구성하려 했던 것은 난민, 고통받는 어린 누군가의 삶과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어른들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법정이라는 최후의 판결 장에서 다룸으로, 방임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직무유기는 엄연한 '죄'임을, 단죄받아야 하는 '죄'와 같은 것임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리라.
놀라운 것은 자인, 사하르는 배우가 아닌 실제 난민이라는 것이다. 자인이 인터뷰에서
"하나도 어렵지 않았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즐거우면 즐거움을, 슬프면 슬픔을 표현하라고 해서 그대로 했어요."라는 말은 대단함보다는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이 더 먼저 느껴지게 했다. 사실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극적인 슬픔, 안타까움으로 소비하지 않는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 이 영화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게한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듯 싶다. 이 영화는 감상으로, 먹먹한 마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감독은 작정한 듯 관객들의 마음과 몸을 울리게 한다.
작년에 개봉한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결을 같이 하는 영화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마음의 온도가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말썽쟁이지만 한없이 사랑스러운 '무니'. 사람들을 속이며 앵벌이를 해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모텔 바닥에 아이스크림을 흘리며 얄밉게 먹지만 그래도 오동통한 배와 볼을 보면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어른들의 무책임한 방임 속에 고통받고 상처받는 어린 누군가를 다룬 점에서는 결이 같지만 영화가 끝나면 <라라랜드>의 보라빛 잔상이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남게 되는 것처럼 '디즈니 랜드'로 뛰어가는 엔딩(아이러니함을 표현한 환경이겠지만)은 그래도 무니의 웃음에서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불행에는 사랑받지 못한 어린시절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의 엔딩은 자인이 '씨익'하고 웃는 모습을 긴 쇼트로 처리한다. 세상의 불행에는 사랑받지 못한 어린시절이 있었다는 감독의 떨림있는 수상소감처럼 사랑받는 어린시절로 불행을 덜어줄 책임은 자인을 바라보는 관객,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와 동시에 피고쪽. 즉, 어른들의 변도 들어봐야한다.
"난 이렇게 태어났고, 그래서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게 죄인가"
라며 법정에서 아들에게 고소 당하는 아버지가 울먹이며 말하는 장면에는 분명 수많은 외부요인으로 인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발버둥쳐도 제자리일 수 밖에 없는 한없이 작은 어른이 보인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지독하게 살아온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느샌가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마는 자인은 거대한 사회 시스템에 속한 개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분노하고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건만, 결국 누군가의 인생은 시스템안에서 굴러가는 부품처럼 결국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날 수 없게끔 이미 설계되어 있다.
아버지처럼 살지않겠노라 다짐하며, 냄비에 갓난 아기를 담아 세상에 나아가는 자인의 뒷모습은 정해진 시스템 속에 달그락 거리며 기능하는 부품처럼 처연함으로 가득차 있다.
분노에 찬 자식과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울분으로 토로하는 어른들은 모두 희생되는 개인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과연 자인은 가버나움을 탈출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