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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thoutJack Jan 28. 2019

버드 박스(Bird Box), 타인과 관계 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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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Intro


이름 붙이기, 하니 생각나는 것은 역시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이 내포한 메시지처럼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관계 맺기의 시작이다.


1. 타인에게 이름 붙이기


이름 붙이기는 구분 짓는 일이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로부터 내가 아는 '그' 혹은 '그녀'를 구분해내어 기억할 수 있다. 이름이 기억된 존재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그는 나의 세계에 들어와 유일성을 갖추고, 내 세상의 일부, 혹은 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가 되어간다.  

그러지 못하고 나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의 세계에서 타자의 위치에 머문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뉴스를 통해 본 사람들이나 서울 어느 밤, 시끌벅적한 클럽의 구석에서, 술에 취한 채, 잔을 부딪힌, 이름 모를 누군가는 다음 날이 되면 흐릿한 형상으로 남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클럽에서 만난 분홍 티의 그녀, 혹은 파랑 셔츠의 그놈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생물학적, 물리적인 구분이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고 분홍과 파랑의 구분이며, 티와 셔츠의 구분일 뿐이다. 이러한 구분은 관계의 시작을 달성하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여성과 남성, 분홍과 파랑, 티와 셔츠들로부터 어제 클럽에서 만난 그들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확한 구분을 위해 우리는 그 존재의 속성을 기억한다. 그 존재의 이미지, 기억, 추억, 정서, 느낌 같은 것들이 내가 인식한(혹은 부여한) 이름과 매칭 된다. 이러한 존재의 추상성은 물리적인 구분 요소들과는 층위가 다르다. 물리적 요소가 아니라 추상적 요소들만이 해당 존재에 유일성을 부여해주고 타인들과 세계로부터 명확하게 구분시켜 준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2. 버드 박스의 규칙. 눈으로 보면 죽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산다.


재앙이 시작된 버드 박스 세계관의 규칙 간단하다.

눈으로 보면 죽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산다는 것.

 세상엔 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 희망, 배려, 공감 같은 것들. 반면, 사람을 죽게 하는 가장 추악하고 절망스러운 것들은 눈에 보인다. 살인, 폭력, 고문 같은 것들.

타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타인은 나에게 너무나 멀고 아득한 존재이며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공감할 여지는 없고 구분 지어 관계를 맺을 여지는 더더욱 없다. 공감과 관계 맺기가 되지 않으니 타인은 그저 타인. 입체성을 상실한 채, 단면적으로 주위에 둥둥 떠다니는 종이인형과 다를 바 없다. 종이 인형들은 베기 쉽다. 옆과 뒤, 속이 없으니 있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판단해버리면 된다. 누군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선 강력한 판단이 먼저 와야 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이인형들 따위 언제든 죽여버릴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타인들도 나를 종이인형처럼 볼 것이란 인식이다.

이것을 자각한 순간, 타인들로 가득 찬 세상은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누구와도 공감하거나 소통할 수 없는, 서로를 종이 인형으로 바라보는 악령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 홀로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무섭다.

이것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가린 채,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다.


3. 눈가리개를 하고 디스토피아를 헤쳐나가야만 하는 여자의 이야기


디스토피아. 눈가리개를 한 여성과 그녀의 아이들일 거라 짐작되는 작은 소년, 소녀가 불길한 강에 배를 띄운다. 배는 강물 위에서 위태롭게 떠내려간다. 배 위에서 여성은 아이들에게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눈가리개를 벗지 말라고 경고한다. 아이들은 겁을 먹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의 시간은 과거로 흐른다. 디스토피아 이전, 세상이 평온했을 때 그녀는 도심의 한 주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 속 모든 사람들은 따로 떨어져 있다. 그녀는 그 그림이 사람들은 결국 서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 그림이 그녀를 표현한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별 기대가 없다. 임신한 후,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배를 보며 입양 지원서를 만지작거리고 알코올 파티에 갈 생각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모성'이라는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모성 또한 관계 맺기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 할 때 그녀는 아직 자신의 뱃속에 있는 타인에게 어머니로서의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다.

이런 그녀에게 초자연적 재앙이 들이닥친다.

눈을 뜨고 뭔가를 '본'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자살해버리는 기괴한 일이 시작된 것. 그녀는 재앙 속에서 자신의 친동생, 함께 생존해 온 사람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들을 연달아 겪으며 서서히 변화한다.

좀 더 정확하게, 그녀는 세 단계를 거치며 변한다.

먼저 첫번째, 관계 냉소적 단계. 

재앙의 직후, '생존자의 저택'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 현 상태를 분명히 드러낸다. 타인을 대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은 타인과 세상에 대해 아주 호전적인 사람과, 그 반대로 그들에 대해 아주 관용적인 사람 사이에 있다. 타인을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헌신적이지도 않는 '보통'의 위치. 사실, 그러한 판단들을 내리는 것에 조차도 관심이 없는 관계적 미온의 상태. 그녀는 자신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도덕성으로 타인을 대하고, 그들과 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서 별 기대가 없다. 처음 그녀가 드러냈듯 관계에 대한 냉소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이 상태야 말로 현대의 우리들이 가장 공감 할 만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타인에 대해 불편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그리고 반대로 그들에 대해 불리한 판단도 받지 않으려는 태도. 적당한 도덕성을 내비치며 어떤 관계에서든 피해받지 않고 적당히 좋은 모습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태도. 타인과 세상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돌보고 관찰하는 것에 에너지를 집약하는 태도. 모든 것이 현대화되며 분열된 세상 속에서 나의 생존에 가장 유리한, 관계적 냉소의 상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과 어울리고 바쁘게 소통하면서도 점점 더 고독해지는 이유는 이것이다. 모두가 관계에서 판단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겉으로는 적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불편함 없이 섞이더라도 속으로는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냉소를 품고 있으니까. 그런 거리감을 가지고 타인과 깊이 연결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그녀의 모습과 행동에 하나씩 공감 할 때쯤 다음 단계를 보여준다.


두 번째 단계, 소극적 관계 지향적 단계

이윽고, 그녀가 그간 뱃속에 품고 있던 아이가 태어난다. 그녀는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와 비극적으로 죽은 올리비아의 아이를 광신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다. 파괴된 생존의 거처를 떠나 여정길에 오른 그녀는 연인이 된 '톰'과 함께 두 아이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제부터 그녀는 세상과 타인에 대해 또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멸망한 세상과 타락한 타인들로부터 내 사람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각오다. 온갖 악한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녀가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인식하며 내 주변에 있는 '현실'을 보고 대처하는 것에 집중한다.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상상, 먼 곳에 있는 타인들이 선량할 것이라는 상상,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들 따윈 멀리 치워버린다. 그런 달콤한 상상은 절망적 현실에서 생존하는데 오히려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에 배신 당할 때 그들은 더 큰 절망에 빠질 것이고, 어쩌면 현실을 살아갈 힘조차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지옥같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대신, 그들을 '보이'와 '걸' 로 구분한다. 이름을 갖게 되면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 그 세상 속 타인들과 유일한 관계를 맺어가야 할 텐데, 지금 세상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 세상이 결국 그녀에게서,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악몽이다. 그런 두려움이 그녀로 하여금 아이들과 진실된 관계를 맺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을 경계하게 만든다.

이야기 구조상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 속 안타고니스트인 '광신도'들의 태도와 겹쳐보인다. 그들은 재앙이 닥친 세상에서 눈을 떠도 죽지 않는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이해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의 죽음과 공포, 절망과 혼돈을 보고 '아름답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고,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들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하여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눈으로만 보이는 추악한 쾌락만을 인식하며, 진정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볼 수 있는 내면의 눈은 거세되어 있다. 이들과 주인공의 시각을 동일시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밝힌다. 그것의 단초는 주인공과 갈등을 일으키는 톰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현실만을 바라보는 것은 생존할 뿐이야. 우리 아이들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해."

결국 톰이 죽음을 맞이한 이후, 그녀는 이대로는 자신과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최후의 여정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시작 장면이다. 그리고 이 최후의 여정에서 그녀는 마지막 내적 변화 단계에 진입한다.  


세번째 단계, 세상과 타인 안에 내재된 고유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단계

형식에 맞춰서 적극적 관계 지향적 단계, 라고 쓰려다가 주제적으로 맞지 않아 글자수를 늘렸다. 적극적 관계 지향적 태도가 이 이야기의 최종 노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보다 더 높은 층위의 주제의식을 다룬다. 타인을 어떻게 대할까, 에 대한 대답으로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존재로서 이해해야 한다, 라는 보편적 주제의식에서 한 단계 좁혀들어가며, 타인의 내면에 깃든 개별적 고귀함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라는 대답을 이끌어 낸다.

이것의 화두는 강의 급류를 목전에 둔 그녀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두 아이, '보이' 와 '걸'에게 말한다. 자신은 운전을 해야하니, 둘 중 하나가 안대를 벗고 밖으로 나가 급류가 어떻게 흐르는지 봐줘야한다고. 안대를 벗어야 한다는 것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맨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악령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다. '내가 밖에 나가 볼게요.' 라고 대답한 자신의 친아들의 말을 무시한 그녀는, 올리비아의 딸인 '걸'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본다.

도대체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딜레마가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아이들이다. 하나는 친아들, 하나는 타인의 딸. 둘 중 하나를 죽여야만 할 때, 사람은 초연할 수 있을까. 눈으로만 본다면 답을 내릴 수 없다. 객관적 사실과 학습된 생존 논리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그 너머의 더 고귀한 것을 꿰뚫어보아야만 결정 할 수 있는 문제다. 결국, 그녀는 일련의 과거 회상을 거쳐 '걸'의 그 자그마한 몸집 이면에 거대하고 고귀한 존엄이 일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눈치챈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한다. 아무도 급류를 보지 않기로. 생명을 저울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모두가 동등한 상황에서 급류를 헤쳐내리라 다짐한다. 결과는 신 만이 알 것이다. 이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인간다움과 신념에 가까운 가치를 선택하는 일뿐이다. 이 선택으로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과 아이들을 딜레마에서 구해낸다.

이제야 주제 도출을 위한 기초 공사가 끝났다. 진실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모두의 존엄성이 같은 값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은 상태가 된 것이다. 마침내 목적지인 강 하류에 도착한 그들. 끝까지 쫓아온 악령의 목소리가 현실화되어 그들을 괴롭히지만, 그들은 결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일차원적인 세상에서 보여지고 들려오는 모든 허상들을 무시한 채, 멀리서 들리는 '새의 소리'를 따라 걷는다. 그 '새의 소리'가 이끈 곳엔 결코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낙원'이 펼쳐져 있다.


4. 버드 박스, 타인에게 내재된 고귀함 보기


낙원에 도착한 그들은 알아챈다. 이 낙원은 다름 아닌, 한때 시각장애인학교 였던 곳이다. 애초부터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살던 곳. 내면의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고귀함을 지켜왔던 곳.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서 그녀는 '보이'와 '걸'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보이'에겐 자신이 아는 가장 용감한 이름인 '톰'(한때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연인인)을, '걸'에겐 자신이 아는 가장 다정한 이름인 '올리비아'(걸의 친엄마, 누구에게나 한없이 베풀어주었던)를.

비로소 그녀가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다. 타인은 나만큼이나 존귀한 존재이며 그들 내면엔 '용감함', '다정함' 과 같은 아름답고 유일한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런 가치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만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타인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때 진정한 관계 맺기는 시작된다.

결국, 이 이야기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 극단적 냉소를 품었던 한 여자가 어떠한 사건을 통해 누군가(자신의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진정한 어머니가 되어가는)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5. Outro


혐오의 시대라고들 한다. 우리는 텔레비전 너머의, 인터넷 뉴스 너머의 타인들, 혹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이 단지 종이인형이 아니라 우리만큼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체감하며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입체적이고 집요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내면에 가장 아름다운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상상력. 그 상상력만이 타인을 유일한 존재로 승격시켜주며, 이를 명확히 볼 수 있을때만이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할 수가 있다. 그런 고로, 우리는 눈을 감고, 상상해야만 한다. 버드 박스에서 울리는 새의 소리 같은 것들을. 그들의 내면에 잠들어 있을 아름다움을. 그렇게해서 나 또한 누군가의 세계에서 유일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겨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버드 박스의 재앙처럼 자살하지 않고) 삶을 계속 살아갈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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