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중국어 못해도, 지도 못봐도 괜찮아요 feat. 14개월 아기
남편은 나를 만나고 비로소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눈앞에 닥친 일상을 살아내느라 배낭여행은 꿈도 못꾸고 살던 남편은 첫 여행을 시작으로 1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똑같지만 긴장의 연속인,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는 남편에게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내 뱃속에 아기가 있을 때도 무리없이 진행됐던 남편의 의식이 올해는 제동이 걸렸다. 작고 여린데다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14개월 아기가 우리 곁을 24시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여행지를 검색했다. 대부분 4~6시간 거리의 동남아시아 휴양지가 가족 여행지로 인기가 좋았다. 휴양지이면서 적당히 볼 것도 있고 먹을 것도 많은 베트남 다낭이 좋겠다. 다낭으로 목적지를 잡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우연히 제주항공 특가 항공권 발견! 마카오 행이었다. 갑작스럽지만 안될 이유가 없었다. 작년에 홍콩에 다녀오면서 마카오를 들리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에 잘됐다 싶었다. 이 세금 저 세금 다 합쳐도 3명(정확히는 2명입니다. 아기는 좌석이 없어요)티켓이 40만원이 넘지 않았다. 오히려 비행시간이 더 짧았고 아이의 낮잠 시간과도 겹쳐서 안성맞춤이었다.
마카오를 여전히 홍콩 갈 때 하루쯤 건너 갔다와야 하는 '깍두기'로 생각하거나 카지노의 도시로 생각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다. 비행 시간 3시간 30분이면 유럽 부럽지 않은 문화 유적을 보고 한국보다 저렴한 물가로 새로운 음식을 끊임없이(!) 먹을 수 있는 곳이 마카오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지구에는 약 30개가 넘는 포르투갈풍 건물과 중국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이 세트장처럼 잘 보존돼 있다. 여기에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광둥식 딤섬부터 포르투갈식, 인도와 아프리카 문화까지 혼재된 매캐니즈 음식 등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아기와 함께 여행하기에 이만큼 좋은 곳이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우리가 여행을 떠났던 11월은 평균 기온이 25도, 습도는 70도로 생명체들이 숨쉬고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지친 기색 없이 이파리를 반짝이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성인 2명에 소아 1명 왕복 비행기 티켓을 40만원 안되는 금액으로 사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내친 김에 100만원으로 여행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시간은 많지만 돈은 많지 않은 육아휴직자에게 아주 적절한 여행이다. 그렇다고 호텔을 아주 저렴한 곳으로 잡은 것도 아니다. 4성급 이상에 평점 8점 이상, 수영장도 있고 조식도 포함된 곳으로 3일을 예약했다. 숙박비는 310,540원, 비행기 삯은 373,000원으로 70만원도 넘지 않은 금액으로 숙박비와 비행기 표를 샀다. 현지에서 쓸 돈은 홍콩 달러로 3000불, 환화로 하면 449,130원으로 넉넉하게 바꿔갔다.
마카오는 북쪽에는 마카오 반도, 남쪽에는 타이파, 코타이, 콜로안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규모 호텔과 카지노가 있는 곳이 남쪽이고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곳이 북쪽이다. 마카오를 여행하는 목적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지구를 돌아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지구 근처로 숙소를 잡았다. 여행의 목적이 있었지만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반드시'라는 건 없었다. 보면 좋고 못보면 그만이라는 가벼운 마음을 가져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는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부터 앓기 시작한 감기로 아이의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마카오의 따뜻하고 습한 기후가 해결해 줄 거라 생각했다. 요양 여행이라고 합리화했다. 두 번째는 아이가 얼마 전부터 유모차를 비롯한 탈 것과 아기띠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기를 데리고 여행할 때 있어 유모차는 필수다. 유모차도 없이 돌쟁이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가는 무모한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아이와 씨름하느니 집에 있는 게 나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안고 다니면 된다며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우려하던대로 아이는 여행 초반에 컨디션이 안좋아 전혀 걷지도 않고 유난히 더 안겨있으려고만 했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아이에게 한번의 싫은 내색도 없이 웃는 얼굴로 두팔과 넓은 가슴을 내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행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알아가야 할 게 많다.
첫 째날 세나두 광장 주변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세나두 광장은 성 바울 성당 유적과 함께 마카오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마카오에 가장 먼저 지어진 성 도밍고스 성당, 중앙우체국, 행정청 역할을 하던 레알 세나두 등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면서 쇼핑지구와 인접해 있어 늘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포르투갈 풍 유적지 건물 아래는 백화점 1층에 입점해 있는 다국적 화장품 매장들이 들어가 있었고 건물 사이사이는 활기 넘치는 시장 상인들이 채우고 있었다. 명동이 떠올랐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고인돌은 박제된 형태로 일상 생활과 멀리 떨어져 어느 외딴 곳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느낌이라면 마카오의 문화유산은 가장 핫한 곳이었다.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세나두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봐도 그만 못봐도 그만이라는 쿨한 마음을 가졌다지만 몇 가지는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대표 유적지인 세나두 광장이었고 혹시나 뒤로 미뤘다 못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았다. 하지만 그 뒤로도 여행 마지막 날까지 세나두 광장을 매일 출석했다. 중요한 곳을 가기 위해서는 그곳을 거쳐야만 했다. 누군가 마카오 여행을 계획 중이고 주말에 당도하는 일정이라면 비교적 한가한 콜로안 빌리지나 타이파 빌리지부터 돌아봐도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둘째날 일정은 호텔과 가까운 성 라자루 성당 지구에서 시작했다. 성 라자루 성당구는 가장 포르투갈 분위기를 느끼기 좋은 곳이다. 바닥과 하늘과 건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이곳이 흡사 옛 유럽의 어느 도시겠거니 착각하게 만들었다. 요즘은 문화예술센터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다양한 갤러리와 전시관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한국의 경리단길 같은 느낌이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덜 상업적이고 덜 북적여서 마카오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곳 중에 하나였다. 유럽의 많은 도시를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던 유럽은 화려하고 정교한 건물이 많았다면 포르투갈 풍 건물은 크림색과 파스텔톤 색 외관, 단순한 장식으로 소박하고 귀여운 느낌마저 받았다. 허세가 없다고나 할까. 포르투갈은 나라나 도시를 대표하는 커다란 랜드마크 하나 없지만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라는 여느 여행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