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 아래

우리는 함께 얘기를 나눴습니다

by 신지후

학창 시절 매년 3~4월에는 어김없이 앓았다. 새 학년, 새 교실, 새 친구, 새 담임선생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늘 벅찼으니까. 낯선 환경은 나에게 설렘이 아닌 불안을 야기했다. 안 그래도 내성적인 나를 더욱 위축되게 만들 뿐이었다. 열다섯의 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새 학년 첫날의 소소한 사건 덕분에 그때를 떠올리면 포근한 기분이 든다.


조금 이른 시각에 등교를 했더니 새로 배정받은 2학년 8반 교실에는 열명이 채 안 되는 급우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 어차피 아는 얼굴 하나 없었으니 3분단 맨 뒷자리에다 가방을 던져놓고 교실 앞 창가로 와서, 의도치 않게 커튼을 뒤집어쓴 모양새로 서서 바깥 풍경을 혼자 감상하고 있었다.


쾌청한 날씨에 감탄하며 나는 혼잣말을 중얼댔다. 아마도 이렇게, "진짜 봄 같다. 오늘 날씨 정말 좋다!" 그 순간 내 곁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치? 날씨가 좋아서 기분도 좋다. 맑은 날 좋아해?" 그렇게 나의 혼잣말에 대답해 주고 나한테 질문까지 하는 여자아이의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 "응. 맑은 날 좋아해. 햇살이 참 따뜻하네." 그렇게 대꾸했고 둘이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선 5분 정도 더 흘렀을까.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소란해진 교실을 의식하게 됐고, 조금 전까지 나하고 얘기 나눈 아이가 누구인지 그제야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이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이제는 교실 안에 30~40명쯤 되는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맑은 날 좋아해?'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서, 그날부터 나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창가에 서서 잠깐 얘기 나눴던 우리 반의 한 소녀를 찾기 위해서. 그 순간의 평화로운 느낌이 정말 좋았기 때문에 왠지 그 아이를 꼭 찾고 싶었다.


5월 중순즈음 우리 반 '강소미'라는 아이가 자기 짝꿍이랑 얘기하다 웃었는데, 아! 바로 저 웃음소리! 그날 그 아이가 분명해! 확신에 차서 "소미야! 너 3월 첫날 창가에서 나랑 얘기하지 않았어?" 그러자, 소미가 씨익 웃으면서 응, 이라고 대답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소미와 친해진 후로는 그날처럼 종종 창가에서 커튼 뒤집어쓰고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소미는 과묵하지도 않았지만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어서 그 아이와의 얘기들은 뭐든지 적당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얘기들을 주고받았음에도 그 아이의 목소리가 예뻐서 그랬는지, 항상 꿈결 같았다고 회상한다.


소미 덕분에 요즘도 가끔씩 그날의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이 떠오른다. 봄 햇살 아래 두 소녀가 서 있었고, 우리는 함께 얘기를 나눴다. 나에게는 그날 아침이 봄날의 기분 좋은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지만, 그날 나와 창가에서 함께 얘기를 나눴던 소미에게도 내가 따스한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