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서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현민' 인터뷰
매일 아침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차려입은 것 같진 않지만, 최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 클래식한 것 같으면서 어딘가 실루엣이 남다른 옷. 자세히 보면 생각지도 못한 디테일이 숨겨져 있는 옷. 단추 하나, 박음질 하나에 디자이너의 고민과 철학이 녹아있는 옷.
굳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옷을 입는 나 자신에게 만족감과 가치를 주는 옷이 있다. 여기에는 명품, 럭셔리라는 말보다는 왠지 '하이엔드'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뮌(MÜNN)'은 하이엔드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한국의 남성복 브랜드다. 디자이너 한현민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독일식으로 표기한 게 그대로 이름이 됐다. 2013년 정식 론칭된 이 브랜드는 다소 독특한 이름에 걸맞게 매 시즌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화려한 프린트나 장식을 이용하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뮌'은 잘 보이지 않는 봉제나 패턴에 독특함을 입힌다. 옷을 만드는 과정을 간단히 하면 패턴이라고 불리는 원단의 조각을 봉제라는 과정으로 꿰매는 과정이다. 서양 복식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봉제와 패턴의 순서와 방법이 있다. '뮌'은 이 정형화된 방식을 '낯설게 하기'를 통해 비튼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샐비지 컬렉션이 그 대표적 예다. 샐비지란 울 원단 끝부분에 회사, 원산지, 혼용률 등을 레터링으로 표시한 부분이다. 보통은 옷을 만들때 잘라서 버리거나 안쪽으로 숨기는 부분이다. 한현민은 샐비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옷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재킷이나 트라우저, 모자 끝부분에는 레터링된 샐비지 라인이 자주 들어간다. 이 독특한 시그니처 룩은 브랜드에 울마크 인터내셔널 프라이즈 우승컵을 안겨줬다.
왜 '낯설게 하기'일까. 한현민은 20세기 러시아 형식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동명의 이론에서 브랜드의 영감을 얻었다. 인간은 일상적인 것보다 낯선 것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고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뮌'이 결국 낯설게 하기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옷을 더 의미 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입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포인트를 옷에 숨겨 놓는다"는 한현민의 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한현민의 브랜드 철학은 옷을 만드는 과정 곳곳에 녹아 있다. 먼저 유럽 럭셔리 브랜드가 사용하는 최고급 원단을 사용한다. 룩북을 보면 심심치 않게 해리스 트위드나 카센티노, 구와무라 등의 상표가 옷에 달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 샤넬이나 루이비통, 프라다 등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에서 사용하는 원단들이다.
옷을 만들 때는 디자이너가 봉제사, 패턴사들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한다. 원단과 패턴을 그대로 공장에 넘기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림 한 장으로 설명되는 옷이 아니다 보니, 직접 만나 상의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룩북 사진을 디자이너가 직접 찍는다는 것이다.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다가 패션디자인으로 전향한 디자이너의 이력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옷이 사진이나 매체를 통해 어떻게 보여지는지 디자이너가 관리한다는 건 브랜드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뮌'의 옷은 디테일에 차별점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룩북에 충실히 반영된다는 장점도 있다.
'뮌'을 보고 있자면 한국에는 세계 시장에 내놓을 만한 패션 브랜드가 없다는 걱정이 기우로 들린다. 한현민은 삼성에서 운영하는 사디(SADI)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안정된 대기업 디자이너가 아닌 자신만의 레이블을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꿈을 키운 것도 우영미, 레이, 구호와 같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국 브랜드를 보면서다. 한국에서도 유럽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는 하이엔드 패션 레이블이 나올 수 있고, 그 길을 이미 걸어온 이들도, 갓 발을 떼기 시작한 이들도 많다는 걸 보여준다.
한현민은 확고한 브랜드 철학을 좋은 옷으로 구현하고, 이를 매 시즌 컨셉에 맞게 풀어내는 패션 디자이너의 정도(正道)를 걷고 있다. 성과는 확실하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선정하는 한국 대표 브랜드 '텐소울'에 4년 연속 선정되고 있으며, 아시아 대표로 울마크 프라이즈를 수상했다.
좋은 옷을 만들고 싶어 시작한 브랜드인 만큼 퀄리티는 타협하지 않는다. 아우터 한 장이 100만원을 상회하는 고가지만, 해외 고급 백화점이나 편집숍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옷을 잘 아는 패션 관계자나 스타일리스트들이 주고객이다. 즉, '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높은 가격에도 기꺼이 고객이 된다.
하이엔드 브랜드라면 응당 패션쇼를 해야 된다는 게 디자이너가 우영미 등 굴지의 레이블에서 경험을 쌓으며 굳힌 생각이다. 매 시즌 독창적인 컨셉을 제시하는 '뮌'의 이번 S/S 시즌 컬렉션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영감을 받았다. 비디오게임의 배경음악을 연상시키는 강한 비트의 전자음악이 서울컬렉션 쇼장을 채웠고,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주제곡이 피날레의 배경음악이 됐다.
맨투맨에 프린팅된 카세트테이프, 모델이 착용한 VR게임 기기, 축구 유니폼을 뒤집은 디자인은 80-90년대 유년시절을 보낸 디자이너와 관객을 연결했다. 디자이너 본인도 추억에 젖어 작업했으며, 관객들도 카세트테이프와 구슬치기용 구슬을 선물받고 기뻐했다. '뮌'은 이번 시즌 바이어와 프레스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낯설게 하기'의 진가는 쇼에서도 나타났다. 가상현실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프론트 로에 유명인사를 초청하지 않았고, 모델의 얼굴은 색색의 천으로 가렸다. 일명 '노 모델, 노 셀럽' 방식이다.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을 더하기 위해 매쉬 소재, 스팽글 소재, 비즈를 곳곳에 활용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꽃잎이 채워진 반투명한 꽃패딩이 눈을 사로잡았으며, 피날레 무대엔 모델들이 하나같이 비료 봉지로 만든 의상을 입고 나왔다. 원색의 레터링이 레트로한 컨셉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 베트남 축사에서 직접 수입한 것이다. 이 재료는 아우터 등의 피스로도 활용됐다.
한현민은 영화를 사랑하는 디자이너다. 영화를 '소설, 음악, 패션, 연극을 모두 아우르는 가장 높은 수준의 종합예술'이라고 정의하는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싱글 맨', '녹터널 애니멀스'를 연출한 세계적 디자이너 톰 포드처럼 영화를 만든다는 꿈도 있다. 이는 디자인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이전에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영국 배경의 '싱스트리트'를 각각 모티브로 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진심을 다해 즐기는 문화가 있다는 건 디자이너에게 큰 자산임이 분명하다. '디자인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고민'이라는 한현민의 말이 확신을 더해준다. 유명 패션 평론가이자 '보그' 미국매거진의 수석 에디터 사라 무어(sarah mower)는 '뮌'의 이번 쇼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한현민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데서 오는 단단함과, 컨셉을 일관되게 풀어내는 내러티브 능력을 가진 디자이너다." 철학과 열정, 즐거움으로 무장한 그를 봤을 때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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