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나 메모를 쓴 적도 없다. 필기노트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글을 쓴 이유는 가슴으로 올라오는 뭔가가 가득 들어 있어, 풀고 싶었다. 지역 주민센터에서 열린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라는 강좌에서, 단순한 그림 한 장면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모에서 ‘나도 저런 책을 쓰고 싶다’라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생각하면 그 방향으로 인연이 닿는 가 보다. 집 가까운 작은 도서관에서 ‘동화책 쓰기’ 강좌가 열렸다. 5주간에 걸쳐 4시간씩, 총 20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교과서에도 글이 실린 작가였다. 2주 후 내가 쓴 글에 피드백을 주셨다. 빨간 펜으로 하나하나 지적해주셨다. 분명 한국인임에도 다시 글을 배워야 할 학생이었다. 선생님에게 창피했다기보다는 글 하나도 정리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부터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면 쓸수록 선생님 지적은 날카로웠다. ‘글은 작가가 써야 하지, 뭣하러 사서 고생하느냐’며 내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속에서 끓고 있는 분노와 투덜거림이 계속 찾아 쓰게 했다.
다음 행선지는 서대문구 독립문에 위치한 ‘이진아 도서관’에서 열리는 시나리오 강좌였다. 쓰면 다 글이 되고 말이 되는 줄 알았다. 과제가 시나리오 한편을 써보는 거였다. 카페에 앉아 A4로 25장 이상을 쓰려니 여간 고된 것이 아니었다. 고구마 10개 먹고 목이 메어 물을 찾았지만 없는 상태로 쓰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글로 사랑을 배웠어요’라는 말로 내 경험 부재를 여실히 지적하셨다. 그때 방송작가가 걸리는 병이 1위가 위장병, 2위가 편두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A4 1장에 삶을 담아내는 작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작가 길보다는 취미로 글을 써보자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도 글을 잘 쓰고 싶어서 기웃거리다 ‘연희문학창작촌’ ‘사진과 시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열린 강좌였다. 사진작가가 매주마다 수강생이 찍은 사진을 보고 해석을 해주었다. 그리고 수강생은 본인 찍은 사진을 놓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인이 내 시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은유와 묘사가 없는 시는 시가 아니며, 더 공부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시’를 잘 쓰고 싶었다. 연남동 근처 ‘대안 연구공동체’에서 이민호 교수가 진행하는 ‘김종삼 시인학교’에 등록했다. 총 8번 진행되는 동안 김종삼 시인의 시를 읽고 느낀 점을 말한 후 각자 시를 발표했다. 등단한 분도 있고, 10년 이상 글을 써오신 분도 있고, 동시 작가도 있었다. 말을 안 했지만 발표 수준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창피함에 주저하지 않는 나는 끝까지 참여했다. 그렇다고 시가 잘 나오는 건 아니었다. 시는 알수록 깊이와 넓이를 모르는 우주공간처럼 보였다. 외계어 같았다. 무르익은 후에 시를 써보자고 한편으로 접고 매일 시 한 편 읽는 걸로 대신하고 있다.
그 무렵 지인 추천으로 이문재 교수가 진행하는 ‘나를 위한 글쓰기’에 등록했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묵혀둔 잔재들을 치워내기 시작했다. 가벼워졌다. 돌아보는 풍경이 달라 보였다. 산책길에 본 나무에서도 밝은 빛을 보았다. 그러자 글이 쓰기 싫어졌다. 뭔가 꽉 막혔을 때 쓰는 게 글이었다. 이젠 그럴 필요성이 없어진 것 같다.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면 크게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남들이 인정할 만큼 세련되고 깔끔하며, 있어 보이는 글이 나올 줄 알았다. 웬걸 한 줄도 써 내려가지 못했다. 교수님이 정성을 다해 교정을 거치지 않은 글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은 ‘무례’라고 했다. 그래서 핑계 무덤을 찾았다. 난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완성된 글을 보일 때까지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모닝 페이지, 3페이지 쓰기’라는 야간 모임에서 ‘나탈리 골드버그’ 작가를 알게 된 후 그냥 써내려 가야 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위대한 작가 흉내를 내고자 하나, 그것은 그들의 길이라고 하면서 그냥 써라고 한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신의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 ‘라는 문구를 통해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 글쓰기는 당신의 친구이다. 글쓰기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당신이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버릴 수는 있어도 당신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 글쓰기 과정은 인생과 생명력의 끊임없는 자원이다.‘라는 외침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쓴다. 내 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광부가 되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