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Day 13-14. 원통분통 아항가마
Feb 28, 2026
(이전 글에서 계속)
호텔맨들이 데려다준 경찰서에서 세상 시큰둥한 경찰들에게 보험처리를 위한 폴리스리포트를 받았다. 상세하게 썼지만 그들이 무언갈 해주길 기대가 되진 않았고, 호텔맨 또한 그렇게 말해주었다. 겉은 큼직한 건물이지만 내부엔 아무것도 없는 휑한 경찰서에는 유치장에 갇힌 사람 두어명 외에 몇몇 경찰들만 앉아있었다. 아무 양식 없는 빈 A4용지를 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내용을 쓰고 마지막에 경찰서의 도장과 서명을 받아 나왔다. 내 보험의 분실물 항목이 빵빵하길 바랄 뿐이다.
호텔맨들은 나와서 ATM 까지도 데려다주고, 친분이 있는 곳인지 조금 떨어진 식당도 툭툭으로 데려다주고 떠났다. 괜찮은 분위기의 바닷가 느낌 식당이었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망고주스는 솔드아웃이라 해서 맥주와 계란 볶음밥을 시켰다. 그냥 그런 맛이었고 대충 먹어 치웠다.
다행히 급하게 뽑은 여분의 카드는 돈이 잘 인출되었다. (욕…) 분하고 원통하다. 이것도 이렇게 원통한데 사고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할까. 귀신이 되고도 남을 것 같다.
아이클라우드 백업 여부 확인을 못해 불안에 떨었으나 애플워치에 사진들이 보이는 걸 보고 좀 안심이 되었다. 원래도 일찍 자곤 했지만 할 것도 없어 9시쯤 불을 끄고 누웠다. 현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이건 꿈일 거야… 자고 나면 악몽이었을 거야… 선크림을 바른다고 했는데도 타버린 팔다리가 열이 오르며 땡겨왔다. 그래도 30여분 만에 잠이 든 것 같다.
Mar 1, 2026
여행 와서 매일 그랬던 것처럼 해가 뜰 때쯤 눈을 떴다. 역시나 꿈이 아니었다. 머리맡에는 애플워치만 충전 중이었고 폰 충전기는 허전했다. 워치에서 find my를 다시 열어보니 밤 11시경 12km 떨어진 어떤 도로로 위치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lost mode로 바꾸었는데, 이 새끼들은 어떻게 이거 써먹을 거지? 또 위치는 어떻게 업데이트된 걸까… 다음에 검색해 봐야겠다.
가방 들고 냅다 튀어서 카드를 사용해 보고 신났을 그들이 떠올랐다. 왠지 3명 정도의 스리랑카 놈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트에서 맥주는 500루피였는데, 1만 루피 정도씩 세 번을 긁은 걸 보면 뭔갈 궤짝으로 산 게 틀림없다. 그리고 자기들의 구역인지 망할 집으로 냅다 튀어서 뭐가 있는지 뒤지고, 옷과 가방을 나눠가지고 누굴 줄 건지, 화장품이 어따쓰는건지 보고… 웃는 얼굴이었겠지. 욕. 이곳 에선 애플이나 삼성은 본 적도 없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제조사의 카메라 렌즈가 뒷면에 대문짝 만하게 박혀 있는 스마트폰이나 피쳐폰 같은 걸 쓴다. 그런 건 얼마짜리일까.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야무지게 방수팩도 사서 새는 거 테스트까지 하고 왔는데 왜 한 번을 쓰지 않았을까. 그 개가 놀고 싶어 꼬리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치대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갈 길 가서 ATM에서 충전해 둔 돈을 뽑고, 노을을 보며 밥을 먹고, 씻고, 마사지를 받으러 갔을 텐데.
몇 년간 swimming..어쩌구는 내 비밀번호였다. 나는 스위밍 하다가 이 지경이 됐다. 이 지경을 주의하라고 온 우주가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여행 마지막 날 긴장을 너무 풀어버렸다. 한두 번 아무 일이 생기지 않으니 괜찮겠지 싶었던 거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리석었다.
어제 저녁에 가려던 눈여겨둔 카페에 왔다. 바닷물은 여전히 엷은 청록으로 빛나고, 파도는 희다. 그늘 자리에 연신 불어오는 바람은 옅은 바다냄새와 함께 시원하고 부드럽다. 완벽하다. 사람들은 나 빼고 다 폰이 있다.
바다 코 앞의 좌식 테이블에 앉았다. 완벽하다. 왼쪽 50m 옆은 가방이 사라진 곳이다. 그 새끼들은 또 여길 찾아올까? 범인은 꼭 범죄현장에 다시 찾아온다던 말이 생각난다… 귀국하면 바로 통신사 매장을 찾아가야겠지. 보험을 통해 임대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아니었음)
할 게 없으니 이런 긴 글을 손으로 쓴다. 얼마만인지 모른다. 아마 대학교 시험 볼 때 이후로 처음이지 않을까.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바다를 본다. 역시 완벽하다.
그때 내 앞에 찾아온 개도,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계속 책만 보고 있던 남자도,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욕 나오는 나의 운명도, 뭔가를 탓하고 미워하고 싶진 않다. 그냥 나의 모든 흐름이 이 상황을 향해 하나로 흘러 왔을 뿐, 그럼에도 그렇게 치명적인.. 예를 들어 뭐 여권 이라던지..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아니 이건 아닌 것 같고.
앞에 앉은 여자 셔츠 패턴이 예쁘다. 여긴 유독 여자가 많다. 남자들은 다 서핑 중인가… 모든 건 흘러가면 괜찮아지겠지. 지금의 괴로운 마음이 힘들다. 카페의 대나무발로 된 벽 너머로 그곳이 보인다. 그 새끼들은 여기 다시 오고,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까? 또 이 생각을 한다. 계속해서 바람은 따뜻하고 시원하다.
예약한 공항 행 택시 시간이 1시간 남았다. 커피만 마시고 가려던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카카오가 들어간 스무디볼을 추가로 시켰다. 이러니 살이 안 빠지지… 삶은 계속될 것이다. 내 앞엔 아직 많은 세월이 남았다. 이 같은 불행을 또 주시진 말아주세요. 아멘. 나마스떼. 나무아미타불. fin.
+ 전 날 제일 싸게 예약해 둔 공항행 택시도 내가 최종 컨펌 답장을 못하는 바람에 취소됐다고 했다. 전화해 보길 잘했다. 시간을 넉넉히 잡길 잘했다. A-men….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