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도난기 1. 마지막 날 개랑 놀아주다 가방을 잃다

스리랑카 Day 13 하지만 개는 미워하지 않을 거야

by 면자

이 글은 여행 중 소지품을 잃고 괴로운 마음에 10년 만의 손글씨로 써내려 간 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오니 감성적으론 속상함 전염에 주의하시고 이성적으론 언젠가 생길지 모르는 위기상황 대비에 참고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Feb 28, 2026



A Bad Dream

2월의 마지막 날. 여행의 마지막 날. 여행을 돌아보면 참 행복했다. 계획이든 무계획이든 운이 좋다고 느껴질 만큼 많은 상황이 만족스럽게 잘 맞아떨어졌다.


마지막 저녁 돈을 인출하고 노을을 보며 밥을 먹고, 마사지를 받으러 가려는 길이었다. 웬 든든한 개가 혼자 놀러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친한 척 궁댕이를 갖다 대었다. 놀아 주고 싶었다. 해변의 조개껍데기나, 나뒹구는 둥근 열매를 던져줘 보았으나 시큰둥해했다. 비스킷도 줘 보았으나 먹지 않았다. 잘 먹고 다니는 갠가 했다. 해변 끄트머리 빠져나가는 길의 한산하고 지는 해를 받아 하얗게 빛나는 파도가 또 눈에 밟혀 아쉬움에 가방과 반바지를 벗어 바위틈에 던져 놓고 한번 더 바닷속으로 향했다.



중간 쪽에서만 놀다가 반대쪽에서 들어가니 또 파도의 생김이 달랐다. 낮아지는 수심과 해초에 부딪히며 파도가 사방팔방에서 X자로 몰려왔다. 가끔 고개를 돌려 가방의 위치와 개가 어딨는지 확인했다. 개는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틈에 뭐라도 던져달라고 끼어들었다. 조가비 따위가 아니라 막대기나 들고 있는 옷가지 같은 것에 환장하는 것 같았다. 귀여웠다.


15-10여분이 지났다. 모래를 차며 가방을 둔 자리로 돌아왔는데, 덮어 둔 수건이 바위 뒤로 넘어 가 있었고, 그 아래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사건 현장

왼쪽에 멀어지는 현지인 남자 3명이 짐을 들고 가는 게 보였다. 어렴풋이 내 가방 같기도 했다. 제발..! 나동그라져 있는 신발을 신고 수건을 들고 쫓아가 보았다. 제발 태연한 척하는 도둑이라 내가 뭐라고 하면 마지못해 내놓길, 하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내 마음을 모르는 개는 뛰는 나를 보고 이거다 싶었는지 수건을 빼앗으려고 신나게 겅중겅중 나를 쫓아 달려왔다. 그들은 모른다고 했다. 머리가 얼떨떨. 심장박동수 급상승.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 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모두가 도와주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근처 CCTV가 눈에 보여 그 호텔에 물어보았지만 동작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사실 CCTV를 봤어도 뭐 어떻게 했으려나. 그 와중에도 개는 신명나게 내 손의 수건을 물고 늘어졌다.


옆의 다른 호텔에서 나와있던 직원에게도 물어보았다. 혹시 너네 CCTV를 확인해 볼 수 있니. 보스가 오면 확인해 본다고 했고, 랩탑을 빌려 find my를 통해 분실 모드로 바꿀 수 있었으나… 위치는 잡히지 않았고, 혹시 몰라 에어태그를 지갑에 넣어두었는데 그것은 폰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알림이 오더니만, 폰이 없이 웹으로 find my에 접속하니 리스트 자체에 노출되질 않았다. 카드 분실신고 번호를 검색했으나 영어로만 검색하니 한국 정보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를 안타깝게 여기던 주변 사람들…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저쪽 호텔 CCTV를 확인해 보래서 수영복 차림으로 길가로 나가 몇 번 입구를 잘못 찾았다가 들어간 그 호텔은 리셉션이나 뭐 아무것도 없이 문만 있었고, 에어비앤비였는지 아무도 없어 감시카메라 봐서 뭐 하려나 싶어 그냥 나와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에 뭐 하러 씨씨티비를 애타게 찾으려 다녔나 싶다. 도둑 얼굴 찾아도 찍어 놀 카메라도 없구만…)


우선 숙소로 가서 도움을 청하고 경찰서에 가서 보험처리용 폴리스 리포트나 받으러 가야지… 가는 길에 경찰들이 서 있길래 상황을 말해보았고 한 경찰아재가 내 폰으로 전화를 걸어봐 주었지만 신호도 가질 않더라. 숙소 갔다가 경찰서로 갈게 하고 수영복 차림에 대충 수건을 걸친 채로 복잡한 도로를 건너 호텔에 돌아가 맞아주는 이에게 첫마디… “Can you help me?”.. (욕) ㅠㅠ ㅋ


야무지게 가방에 들어있던 물건들.. 선크림도 거기 있겄구나. (욕) 지갑, 돈 3000rp(약 만오천 원), 신카 1, 체카 트래블로그 1, 선물 받은 귀여운 고양이 그림 나일론 에코백. 내 비싸고 예쁜 룰루레몬 테니스 쇼츠와 맘에 드는 스포츠 탑… 맘에 드는 립 틴트(에뛰드), 팩트(다행히 다이소), 플라스틱 안경집, 책(허송세월), 충전 가능한 베이프(내스티 유자맛), 새로 산 물안경(쿠팡), 호텔룸 키, 가네샤 피규어(기념품 600rp였나), …(욕) 분실물 대비한(왜 함?) 에어태그(in the Kitty wallet), My new 17 pro 512GB iphone with also new standing macsafe card holder by caseby(30,000₩~)~~~~


분노의 일기 원본
눈물 젖은 노트(는 사실 눈물도 안남)


친절한 호텔 직원들은 두 명이나 나에게 붙어서 도와주려 했다. 새로 룸 키를 받아 대충 헹구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호텔 PC로 findmy에 다시 로그인했다. 없어진 데서 조금 떨어진 레스토랑 근처로 위치가 잡혀있었다. 내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직원 두 명이 잽싸게 툭툭을 타고 그곳에 가서 확인해 주었고, 다른 한 명은 내가 카드를 정지할 수 있도록 폰을 빌려주었다. How kind they are…

잘 쓰지 않던 디카를 꺼냈다.



현대카드는 자동 ARS로 처음에 입력이 잘 안되어 빡쳤지만 다시 걸어 분실 신고를 했고, 하나카드는 상담원을 통해 신고를 했는데 급해죽겠구만 천천하고 친절한 상담원에게 승질이 났고, 통화로 알게 된 방금 전에 사용된 카드 3건… (욕)^^ 마트와 주류점에서 5만 원 넘게 3번을 긁었더라. 사고 접수를 하고 비상 연락처로 남친 번호를 불러주었다.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 망할 2nd verification… 주로 쓰는 메일은 폰이 없으니 로그인할 수가 없었고, 유튜브용으로 쓰던 메일 계정으로 인스타그램 ID를 새로 파 DM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읽지 않는 그는 비행기로 출장길에서 귀국 중일 것이다.


CCTV 찾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헤매는 와중에 나의 리스크 대비 액션들이 생각났다. 여행자 보험 O, 휴대폰 보험 O(제일 비싼 거), iCloud백업 O(이거 안 됐을까 겁나 불안), 여분의 카드 O, 여권은 방에 O. 최악은 아닐 수도 있다.


잘 있니 귀여운 DJ 고양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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