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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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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Dec 19. 2022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낡은 생명을 닦아서 다시 쓰는 법

 20일간의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여행 중 집을 맡겼던 친구에게 언뜻 소식을 듣기는 했다만 살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은 나의 막연함이었다. 샤워를 시키고, 햇볕을 쬐어주고, 각종 영양제를 잔뜩 꼽아넣는 것으로 소생을 바랐지만 올해가 끝나가는 이 시점 그들은 전멸했다. 이것은 올 초 독립하며 잔뜩 데리고 온 나의 식물 이야기다.


 식물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대부분의 출발이 으레 그렇듯) 외적인 동기였다. 첫 독립. 집 꾸미기에 한창일 수밖에 없던 그 시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자기 집을 자랑하는 각종 커뮤니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가 초록 초록한 식물들이었으니 플랜테리어는 인테리어를 향한 열정 아래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그 무렵 누군가 내게 조언했다.

 '한꺼번에 사들이지 말고, 조금씩 사서 키워.'

 식물을 사들인다는 것은 생명을 들이는 일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생명임을 완전히 간과하진 않았다만, 당장 주어진 빈 공간을 '나 다운'('나답다'의 정의가 조금은 뒤틀려있던 것 같지만)것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이 앞선 자에게 그런 조언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음날 한꺼번에 다섯 종류의 식물을 집으로 들였다. 아라우카리아, 여인초, 페페, 테이블 야자, 스파티필름. 여기에 선물 받은 용신목 하나와 여우꼬리야자, 고무나무, 크기가 좀 더 작은 페페까지. 집 안 한 면이 초록으로 뒤덮이고 나니 기대했던 그림과 제법 비슷해 보였다.



 식물을 들이고 난 초반에는 평소보다 더 부지런해졌던 기억이 난다.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야 하고, 햇빛과 바람을 쐬어주고, 벌레가 생기진 않는지 틈틈이 확인해줘야 내가 그린 그림이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집안에 인테리어 소품이 아닌 생명을 들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나의 관심과 부지런함 속에서 식물들은 잘 자라주었고, 매주 새로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건 오로지 생명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었다.


 반면 생명이 주는 기쁨 말고도 커다란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있는 감정 또한 존재했다.

 '식물들 어떡하지?'

 하늘길이 열리기 시작할 무렵, 나는 엄마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때 가장 먼저 나의 발목을 잡은 게 집안의 식물들이었다. 10일 정도의 일정이니 큰 문제없을 거라 여기는 한편, 설마 하는 마음이 나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때마침 작업실을 필요로 하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고, 10일간 내 집을 작업실로 마음껏 쓰되 식물들을 챙겨주는 것으로 방법을 찾았다.

 이윽고 나는 엄마와 함께 멀리 떠났고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여행의 새로운 자극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행이 끝날 즈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식물 중 한 녀석이 이상하다고. 사진을 보내보라고 했다. 전례 없는 축 쳐진 모습이었다. 그 꼴이 마치 젖은 머리카락을 달고 있는 귀신같아 잠깐 웃었다. 식물 전문가인 엄마에게 보여주니 과습인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긴 게 꼭 귀신같지 않냐며 한바탕 웃고 넘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귀국 하루 전 코로나 확진으로 10일을 더 체류하게 되었으니. 웃지 않으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더 우울할 것 같았고, 사실 상황이 그러하니 식물 따위 아무렴 어떠냐 싶기도 했다.



 20일 뒤 집으로 돌아왔다. 스파티필름은 젖어서 불어버린 물미역처럼 축 쳐져있었다. 나머지 식물들도 어쩐지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식물을 돌봐준 친구가 원망스럽기보단 책임이 아닌 자유를 택했던 스스로의 업보라 여겼다. 무언가를 책임져야 함은 나의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나의 집에 찬란했던 식물 황금기가 저문 것 같아 살짝 아쉬울 뿐이었다.


 그로부터 오늘이 되기까지, 식물들은 하나 둘 퇴락하기 시작했다. 새것에 큰 가치와 생명을 부여했던 처음의 에너지는 자연스레 낡아가고 있었다. 동시에 나란 사람도 함께 낡아갔다. 공간과 달리 나란 사람은 어디에서든 계속 살아가는 생명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물건들 위로 먼지들이 쌓여갔다. 옷장 속 옷은 어디가 속옷이고 어디가 겉옷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였다. 마침내 식물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되어버렸다.



 나는 몇 주 전부터 회복의 기간을 갖고 있다. 집 안의 식물들은 다 죽었을지언정, 내 한 몸 평생 책임지고 끌고 나가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낡아가는 자신에 더이상의 핑계가 어려워진 것이다.

 죽은 식물들을 정리하며 물건 위에 쌓인 먼지들을 닦아 내었고, 옷장 속 옷을 전부 끄집어내어 종류별로 구분해 정리해두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잔뜩 사 와선 차 한 잔을 끓여놓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느새 나는 다시 깨끗하게 닦여 굴러가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오늘 아침, 이불을 정리하고 사과 하나를 베어 문 채 차 한 잔을 끓여 읽고 싶은 책의 뒷부분을 마저 읽었다. 사무실에 가서 먹을 저녁 식사를 만드는 동시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며칠 째 내가 지키고 있는 루틴이다. 다시 굴러가기 위해 놓치지 않으려 하는 루틴.

 오늘은 특별히 나가기 전 아직 살아있는 몇몇 식물들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알로카시아에서 새 잎이 돋아나 있는 게 아닌가.

 정말이었다. 난 이 친구가 죽은 줄로만 알고 몇 달째 물도 주지 않았다. 정리하는 것 마저 귀찮아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이 한 겨울에 말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본 것은 아무래도, 희망이었나보다.

 다시 피는 생명이 말했다. 제아무리 망가진 모양이 된다해도 절대 죽지 않는 생명, 그게 삶이라고.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너는 내게 낡은 생명을 닦아 다시 쓰는 법을 알려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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