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여행 이야기부터 해볼까
콘텐츠업에 종사한지 올해로 7년 째,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쓰고 그리는 행위 앞에 '어떻게 보일까'라는 뿌연 안개가 늘 따라다닌다. 이곳 브런치에 처음 글을 적을 때만 해도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 같은데, 이젠 자의식이 과잉된 건지, 평가가 두려워진 건지, 아님 나 스스로 제법 쓸만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건지 한 문장 적기가 쉽지 않다.
글 뿐만 아니라 만화도, 그림도, 사진도, 영상도 마찬가지. 가끔 콘텐츠 제작 관련 강연을 다닐 때마다 내가 내뱉는 말에 정작 나 자신은 얼마나 책임지고 있는가 낯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남들이 좋아하는 것, 그리고 세상에 필요한 것,
이 세 가지의 교집합을 찾으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무어라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내 강연의 핵심 메시지다.
과연 그럴까.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틀리지 않은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매력없다. 글이란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는(듣는) 상대의 입장도 고려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히 사적인, 그치만 그닥 궁금하진 않은 일기와 다름이 없다. 신이 나서 자기 얘기만 한 두시간동안 떠드는 자와 내내 마주 앉아있다면, 상상만으로 상당한 곤욕이지 않은가.
남들이 좋아하는 것. 이 부분에만 매몰되어도 문제는 발생한다. 남들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나의 경험치로 반사된 마음을 그저 추측해볼 뿐, 독심술을 쓰지 않는 한 절대적인 정답은 알 수 없다. 오롯한 나의 경험만으로 파악한 상대의 취향을 지나치게 신경쓰는 것만큼 소모적인 일이 없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적당한 눈칫밥을 먹어본 자라면 그것으로 자격은 충분하다.
세상에 필요한 것. 돈 버는 기술이 될 수도, 물질 없이도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 될 수도, 지구촌의 사각지대에 놓여진 수많은 문제에 귀 기울이는 친환경적인 시각이 될 수도 있다. 꼭 도덕적이지만 않아도 된다. 단순 도파민도 포함이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영양가 하나 없이도 순간적인 만족을 선사하니까, 이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필요한 가치일 수 있다. 취지는 좋지만 끝내 가닿지 못 한채 사라진 수많은 캠페인처럼, 이 또한 매몰되는 순간 순식간에 노잼 콘텐츠로 폭락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의 교집합을 찾아내면, 콘텐츠를 만든느 나도 재밌고, 소비자도 재밌고, 세상에도 유익한 '쓸만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되니, 쉽게 지치지 않고 무어라도 쓰고 그리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정작 나는 이 세 가지의 교집합을 찾는 일에 이골이 난 나머지, 이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은 콘텐츠는 '쓰레기'처럼 느껴져 부담 없이 펜을 드는 일이 거의 불가해졌다.
마음을 좀 달리 먹기로 했다. 아주 어린 유년시절엔 콘텐츠에 대한 개념도, 이것을 봐주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도 신경쓰지 않은 채 그저 내가 만들고싶은 것들을 만들었다. 쓰고싶은 문장을 쓰고, 칠하고 싶은 색을 칠했다. 이 글도 그런 의미로 한 번도 고치지 않은 채 이십분간 그냥 막 써내려가는 글이다. 다시 보면 비문 투성이겠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돌아보면 부끄러운 내용도 분명 있겠지만 10분 크로키를 하듯 순간의 생각들을 포착하고 가둬두는데 집중해보고싶다. 어떻게 보면 나라는 크리에이터의 실험장이 될 수도.
우선은 밀린 여행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여행은 내게 수많은 인사이트를 선물한 소중한 소재 보물창고인데, 위와 같은 이유로 재고 또 재다가 아무런 형태로도 콘텐츠로 내놓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서라도 기록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 틈이 날때마다 '밀린 여행 일기'부터 써볼까 싶다. 사진들도 많고, 남들이 쉬이 찾는 여행지만 있는 것도 아니니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이와중에 또 타인 신경쓰네...)
눈치 보지 않는 글 쓰기 위해 이쯤 줄이고, 그냥 바로 발행 버튼을 누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