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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Aug 12. 2024

향의 기억 : 프롤로그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

향기는 단순한 감각의 경험을 넘어,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기억의 매개체다. 후각은 다른 감각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각이나 청각은 비교적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는 반면, 후각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기억을 불현듯 떠오르게 한다. 이 때문에 특정한 향기를 맡았을 때, 우리는 과거의 특정한 순간과 연결된 감정들이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학교 문구점에서 팔던 향이 나는 볼펜에 대한 추억이 아마도 강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다양한 색상의 볼펜이 문구점의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인기가 많았던 것은 은은한 과일 향이 나는 향기 볼펜이었다. 


이 볼펜들은 단순한 필기도구에 그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문구점을 드나들며 마음에 드는 향과 색을 고르고, 노트에 글씨를 쓰며 퍼져 나가는 향기를 즐기는 순간들은 그 시절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볼펜을 사용할 때마다, 글씨에 스며들던 그 향기는 단순히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경험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교과서나 공책에 남겨진 그 향기는 그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학창 시절의 특별한 순간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지금도 비슷한 향을 맡게 되면, 그 향기와 함께 그때의 교실,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 순간은 마치 과거의 자신과 재회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향기에는 시간의 장벽을 허물고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끌어오는 힘이 있다.


향기는 단지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과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한다. 어린 시절, 엄마의 화장대에 놓여 있던 향수병을 떠올리면 누구나 한 번쯤 그 향수를 몰래 뿌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혹은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으로 향수를 손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뿌려졌던 향기는 단순히 좋은 냄새 이상으로,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향수는 나에게는 성숙함과 어른스러움을 상징하는 물건이었고, 그 향기를 맡는 순간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기억이 흐려지더라도, 그 향기를 다시 맡는 순간 과거의 그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당시 느꼈던 감정들 역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철없던 그때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해 주는 고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향기는 또한 사람들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특정한 향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체취,  부모님이 즐겨 쓰던 화장품의 향, 아이들의 풋풋한 냄새는 그들과의 관계를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때로는 그들이 곁에 없을 때에도 그 향기를 통해 그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향기는 단순한 감각적 경험을 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뿐만 아니라, 특정한 장소나 상황과 연관된 향기는 그 장소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휴가철 바닷가에서 맡았던 소금기 섞인 바람의 향기, 산속 오솔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나무와 흙의 냄새, 그리고 부모님 집에서 맡았던 따뜻한 이불속의 냄새 등은 모두 그 장소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이 향기들은 단순히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한다. 다시 그 장소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그 향기만으로도 마치 그 장소에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향기는 그 자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한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타임머신과도 같다.


이처럼 후각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냄새는 단순히 후각적 경험을 넘어서서, 우리 삶의 여러 순간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강력한 기억의 매개체가 된다. 후각이 다른 감각과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과 깊은 연결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냄새를 무심코 맡으며 살아가지만, 그중 일부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특정한 순간에 불현듯 떠올라 강렬한 감정과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향기가 지닌 이러한 힘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흐려지지만, 향기는 그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며, 그 기억 속에 담긴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향기를 맡을 때마다 그때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자신과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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