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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운 Aug 25. 2020

기다림과 성장에 대하여

"일도 사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김헌경 간호학 교수

“다도(茶道) 또한 기다림의 예술이죠.”

멘토는 본인을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보내달라는 말에 다도 사진을 보내왔다. 평소 Vires acquirit eundo, 나아감으로써 힘을 얻는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아마도 집요할 정도로 끈질겨야 했을 열공의 시간 끝에 간호학 박사 학위를 따고 젊은 교수생활을 했던 사람에게 기대한 인생의 키워드 치고는 좀, 은은했다. 기다림과 성장.

“사람을 정리하든, 또는 내가 정리당하든 기회의 시간, 노력의 시간이 필요하죠. 그리고 성장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패를 해도 사람은 성장합니다.”

김헌경 교수님을 만나면 차(茶)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중고등학교 시절까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냥 소심하고, 공상의 시간도 보내고, 또래보다 애늙은이면서 안네 프랑크처럼 일기장에 이름 붙여 친구로 삼고, 화초에 이름 붙여 대화하기도 하고 그런 아이였어요.”


그런 소녀는 고등학생 때 한국화를 그리며 기다림의 미덕을 어렴풋이 느꼈다고 한다.

“밑그림을 그리고, 먹을 갈고 색을 입히기까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시간이 필요해요. 그게 일도 사람도 그렇더라고요.”



-연애에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듯, 기다림의 순간이 어긋나거나, 부족하거나, 과하면 결국 삐걱대요. 삐걱댈 땐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과거엔 손 편지를 쓰거나, 계속 혼자만의 시도를 했는데 상대에게 이런 게 부담이 되기도 해서, 지금은 우선 시간을 “흘려보낸 후’ 다시 연락을 해요. 일도 사람도, 여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화에서 여백의 공간미가 중요한 것과 같아요.


-일의 여백은, 원하지 않을 때 찾아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통역사에게 코로나 시국이 그렇습니다. 집착을 벗어나고 싶은데 잘 안돼요.

하지만 일도 사람도 집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해요. 나름의 time-out제도를 두고, 거리를 두면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나이 마흔을 앞두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요, 좀 놀랐던 게, 제가 힘들고 불쌍할 때 ‘만’ 제게 잘해주는 친구도 정리대상인걸 깨달았어요.

맞아요. 내가 불행할 때 위로와 위선의 구분이 잘 안 되는 법입니다. 사람 심리 중 남의 불행과 힘겨움을 보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 그래서 곁에 그런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이가 있어요.


한국화를 그리던 소녀는 미대나 음대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안에서 미대나 음대를 보내줄 리 없었다. ‘그런 얘기할 바엔 대학 가지 말고 좋은 대학 다니는 명문가 아들하고 결혼을 해라’는 말에 도망치듯 입학한 간호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실습 나가서 칭찬도 듣고, 환자나 보호자가 학생인 제게도 고마워하니까, 그래 한 번 해보자. 그랬던 거죠.”

좋은 말만 들었던 건 아니다. 넌 서울의 명문대 출신이 아니니 구박받아도 된다는 식의 말에 상처 받을 때도 있었다. “이른바 ‘태움’ 문화죠.”

더 배워서 당당하게 가르치고 돕자는 생각에 대학원을 진학했다. 공부로 성취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전문가 선배’가 되고 싶어서 택했던 석사과정은 박사로 이어졌다.


-교수님도 정말 늘 어려운 길을 대범하게 걸어오신 게 아닐까요. 쉬운 적이 없으셨을 것 같은 발자취입니다.

상처 받고 좌절한다고 누워만 있으면 더 힘들어요. 힘든 일에 몰두하면 내가 정말 그런 사람 같아 보일 뿐입니다.


사실 늘 우리가 이런 심오한 대화만 하는 건 아니다. 우린 신일숙이며 이은혜, 이런 옛날 만화 이야기도 해야 하고 요즘은 태국 드라마 얘기도 해야 한다. 각자의 배우자에 대해 은근한 애정 섞인 ‘디스’도 한다. 간호학과 교수에서 지금은 프리랜서 강사로, 변신을 꾀한 교수님의 길이 늘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거라 짐작한다. 학자로서도, 직업인으로서도 일가를 이룬다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일까. 그런 멘토와 나누는 소소하고 쓸데없는 대화의 시간이 더없이 귀하다.


깨알같이 얼굴을 가리신 우리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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