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동이 Sep 06. 2020

스물여섯 살의 인생이란 게

      나만의 책을 출간할 요량으로 짜 맞춘 한쪽짜리의 계획 덕에 브런치 심사를 통과한 것이 1년 전이지만, 지속되는 고문 같은 삶에서 어떠한 의욕도 찾지 못하고 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 우울증을 해설해보려 하지만, 이제는 의욕의 감퇴, 불안이다. 신경계의 호르몬 분비는 이토록 민감해서 쉽게 붕괴되는 것인가? 


      나의 감정을 신경계의 활동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정의 소중함을 덜어냈다는 것이다. 감정이 내 삶에 개입하는 여지를 줄이는 것이 나에게 의욕의 감퇴를 가져온 것인가? 여기, 아무도 읽지 않을, 그렇지만 여전히 외부인을 독자로 설정한 지극히 나만을 위한 글이 있다. 


      14년 10월부터 도일하여, 곧 7년 차를 맞이하는 스물여섯 살이, 공학원 석사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이라고는, 국가장학생 전기 예비과정으로 경희대학교에서 6개월 동안 일본어 교육을 받은 게 전부이니까, 일본에서 내 20대의 절반은 흘려보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대학시절부터 외국에서 유학한 내 지인들은, 일본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외톨이다. 나도 역시나, 6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외톨이였다. 


     좋든 싫든, 학부생이었던 시절에는, 같이 도일한 동기생들, 선배, 후배들과 함께 지냈다. 3년 동안 동기 세명과 동거하고, 유학생회 부회장을 잠시 맡았으니, 비록 일본친구는 없었어도 외로울 일은 없었다. 


      대학원을 준비하기 시작한 4년생 시절부터 고독은 좀처럼 뗄 수가 없다. 매년 같은 대학원을 준비하는 동기는 많아야 세명이다.  같은 상황에서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소중한 나의 환경에서, 서로 공감해 줄 수 있는 동기가 없었다. 같은 대학원을 준비한 동기가 한 명 있는데, 동거하면서 손해배상 문제로 싸우던 사람의 연인이었다. 게다가, 대화도 잘 통하지 않는 사이였으니, 대화해봤자 두통만 심해진다.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인생은 고독과 고통이었다. 조던 피터슨의 입에서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헛되이 한국의 인스타그램이나 쳐다보며 남들의 멋있는 인생에 대고 나의 고통을 재단했을 수도 있겠다.


     받을 수도 없을 장학금을 신청하며, 수리되지도 않을 수업료 면제를 신청하고, 식비를 줄여가면서,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면,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다. 더군다나, 성적을 신경 쓰며 학점이나 따는 지긋지긋한 생활을 스물다섯 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 자신의 상황을 변호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내 감상으로는, 사람이 사는 게 마치 늪과 같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평지지만, 밟으면 빠져들고, 소리치고 팔다리를 휘둘러 보았자 깊숙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한데, 늪에 완전히 빠져들고 나면 삶이 바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되거나, 새로운 밝은 세상으로 떨어지거나,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자의로만 진행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면, 우리는 높은 자리에 안착한 사람의 인생에 찬사만을 보낼 것이다. 사는 건, 운칠기삼이다. 


      내 연구테마에 관해서 말해보자. Haggard(2012)는 인간이 행동에 대해 "조작 감각(Sense of Agency)"를 지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조작 감각의 감퇴 조건을 연구한다. 조작 감각은 행동에 따른 책임감을 발생시켜주는 내적 판단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조작 감각으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느끼는 우리들에겐, 사는 게 운칠기삼인 것이, 복잡한 얘기다. 회사 면접에 합격한다면, 그날 아침 일찍 가기 위해 무단 횡단한 자신을 칭찬할 것이다. 그게 마치 면접에 합격한 비결인 것처럼.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무단횡단이라는 비도덕적 행동은 불합격의 이유가 되겠고.


      행동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인생이 가져다주는 결과물이라는 게,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달콤한 과실이라고 여긴다는 게, 신이 우리를 장난감 취급하는 것 같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우리는 달리고 있고, 결과는 운칠기삼이라는 것이다.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의 방을 어둡게 했다가, 밝게 했다가, 그의 앞에 먹이를 떨어뜨렸다가, 전기 충격을 준다. 햄스터는 열심히 달리고, 그에 따른 결과는 사실 무작위다. 이 햄스터와 인간이 무엇이 다를까? 


    물론, 우리는 햄스터와 다르다. 많은 상황을 처음 접하고, 당황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간다.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는 절대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가 될 수 없다.


      거시적으로 보자. 지금의 직업을 위해 어릴 적부터 훈련받았던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긋지긋하도록 뻔한 얘기지만, 고용인에게 고용되는 피고용인의 주체성이 무결하게 입증될 수 있는가? 회사를 '골라' 들어가느냔 말이다.


      상기한 것처럼, 답도 없는 허무주의적인 고찰을 하는 게 내 취미다. 남들과의 의논 없이 결정하는 나의 인생에서 조작 감각을 선명하게 느끼고, 이를 즐긴다.


    근래에서는, 고통을 유발하는 환경에 자신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이 진정 주체적인 삶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이 도피하는 상황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학습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유학생활과 합치하는 것이며, 이런 생활을 즐기는 것만이, 나의 유학생활을 합리화시켜준다.


    문제점은, 고통이 있으며, 내 신경계는 한계점을 넘어서 과부하된 지 오래되었다. 수면 조절, 식욕 조절은 내손에서 떠나간 지 오래되었으며, 내 감정, 내 의욕, 심지어 성욕까지 감퇴되고 있다.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산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강조하던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night."에 감명받던 나의 마음은, 나를 꺼트리고 있을 뿐이다. 


    타인이 필요하다.




Photo by Gabriel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