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삶, 멋진 죽음을 위하여
요즘 거실 창 밖을 내다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 그런 것 같다. 우리 집 앞에는 Tanaka Farm에서 관리하는 제법 너른 밭이 있다. 이 농장은 남가주의 연중 온화한 날씨 덕으로 2 모작 내지 3 모작을 한다. 그동안 딸기, 콩, 샐러리, 파, 펌킨, 그리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야채들의 씨가 이 밭에 뿌려지고 또 열매가 거두어졌다. 흙을 갈고, 씨 뿌리고 비닐을 덮는 것은 대부분 기계와 장비를 이용하지만 수확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열매를 일일이 손으로 따고 차에 싣는 일을 한다.
창문 앞 커다란 나무들은 다람쥐들의 놀이터다. 가끔 우리 창틀까지 기어 올라와서 유리창을 마주하고 우리와 눈싸움을 하기도 한다. 우리 집 옆의 bush와 잔디밭은 토끼들의 영역이다. 저녁 무렵 나가보면 맛있게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야생 동물인데도 편파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Coyote 빼놓을 수 없다. 아이들이 아끼는 토끼나 다람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적’으로 대접받지만 배가 고파서인지 밭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떨어진 열매를 킁킁 냄새 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밤이 되면 싸우는 건지, 노는 건지 모르지만 그들의 하울링 소리가 방음이 잘되는 우리 집 창마저 뚫고 들어온다.
산책로 주변의 나무와 풀들도 우리의 이웃이며 친구다. 아이들은 여전히 벌레를 보면 기겁을 하고 무서워하면서도 길가에서 매일 만나는 벌레나 달팽이를 친근해한다. 심지어 Suzie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 벌레도 있다.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 주변엔 owl이 산다. 그들의 깊이 있는 울음소리는 다른 작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는 확실히 구별된다. 까마귀들은 그들의 소리를 기가 막히게 흉내 내는 둘째 딸 지영이와 잘 통하는 친구다.
어제는 지영이가 자기 방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난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요즘 이른 아침 집 주변 산책길을 걷는 동안 눈 주변이 뜨끈뜨끈해지곤 했으니까. 그게 뭐 특별한 거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이젠 익숙해진 것을 넘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 16년은 무척 긴 세월이다. 이것들을 추억의 영역으로 집어넣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하지만 이젠 정들었던 이곳과 이별을 해야만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전혀 기억에 없고,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장소는 원주다. 사실 그곳 역시 3살 때 서울로 올라오기 이전이니 거의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개울가에서 뭔지 모르는 작업을 하던 불도저의 요란한 소리만은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큰 소리를 내는 기계를 ‘길땅땅’이라 명명했던 것도.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의 장은 서울에 올라와서의 첫 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서 정말 오래 산 줄 알았는데 지금 계산을 해보니 겨우 6년을 살고 이사를 했다. 지금 이 집에서의 16년보다 그때의 6년이 훨씬 길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확실히 내가 나이를 먹어도 꽤 많이 먹었나 보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자주 미국에 출장을 다니셨다. 짧게는 2주, 길게는 몇 달 동안 가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 가시면 친구분들 가정에 초대를 받아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고 하셨는데 집에 돌아오시면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곳 아이들은 너른 집과 잔디밭 정원에서 뛰노는데 너희들을 이렇게 좁은 집에서 자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이제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난 큰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아파트(한국의 아파트와는 다른 rental home을 말함)에 살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다지 부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난 내가 유년기에 지냈던 서울 변두리의 작은 집(아버지가 미안해 하시는)을 아직도 그리워할 뿐 아니라 내가 자랐던 환경과 그곳에서 만났던 만남을 정말 최고의 장소로,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위에서 나열한 우리 집과 주변 환경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을까(희망 사항).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은 이 작은 아파트에서 지난 16년간 정말 잘 살았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나는 이 기억에 대해 감히 ‘행복’이라는 label을 붙인다. 행복이란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나의 현재를 보며 느끼고 고백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별은 늘 아쉬움과 미련을 갖게 하지만 새로운 만남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장은 우리에게 떨림을 준다. 그 떨림에는 당연히 불안과 기대가 함께 섞여있다.
나는 50대의 끝자락에 처음으로 나와 아내의 이름으로 등기된 집을 갖게 되었다. 솔직히 그것 자체에 큰 감흥은 없다. 내가 사는 곳이 내 집이지, 소유 여부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지난 16년간 ‘우리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잘 살았다. 단지 의미를 두는 것은 이사를 계기로 우리는 새로운 chapter를 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새 집으로 간 후 몇 달 후면 또 다른 이별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큰 딸을 멀리 보낸 후 우리의 삶,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바뀔까. 날마다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울고, 기뻐하고, 화냈던 것과는 또 다른 양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게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경험하게 될까. 언젠가는 새로운 만남이 배제된, 기억마저 소멸되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이별 경험은 그날을 잘 준비하기 위한 연습일런지 모른다. 내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소유하지 못할 것을 위해 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멋진 삶, 죽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이사 가요’라고 한 문장으로 쓸 내용을 감정의 늪에 빠져들어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냥 나이가 들어 호르몬 분비가 변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