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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ngwon Kim Sep 26. 2022

‘호화주택’의 추억

9시 뉴스를 보고 있던 우리 형제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 박XX 대통령은…” 으로 시작된 뉴스 앵커의 첫 멘트는 그 독재자께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국민총화를 해치는  ‘호화주택’을 강력히 단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박XX는 지금 감옥에 가있는 그분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영구집권을 꿈꾸고 있었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이야기다. 그런데 그 뉴스가 우리 가족들과 무슨 관계가 있었냐고?


우리 가족이 서울의 한 변두리 동네로 이사 온 것은 내가 만 3살 때였다. 운명과도 같은 어떤 우연에 의해 내 ‘고향’이 된 그 동네는 바로  구로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유일한 친척이었던 작은할아버지께서 집 구하는 것을 도맡아서 해주셨다고 하는데 전농동에 사시던 분이 어떻게 넓디넓은 서울의 반대쪽 끝자락에서 집을 찾으셨는지 의문이다. 아마도 집값이 싼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고, 새로이 서울에 편입되어 개발되며, (첨단?) 공단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그곳이 서울의  ‘신시가지’가 될 거라는 (잘못된) 전망을 갖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우리는 ‘공영주택’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건평이 7평 남짓한 작은 집에 살았다. 그나마 주변의 ‘간이주택’, ‘구호주택’에 비해선 ‘번듯한’ 집이었다. ‘마당’이나 자체 ‘변소(화장실이라고 부르기 곤란한)’가 없는 집들도 많았으니까(아마 정부에서 한 ‘짓’일 텐데 공식적인 주택 이름을 저따위로 붙였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동정심이 저절로 유발될만한 환경이었지만 그곳에서 보낸 내 유년기는 재미있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어른 두 사람이 마주 지나가기에 빠듯할 만큼 좁은 골목에서 친구들, 동네 형 누나들과 얼마나 재미있게 다양한 놀이를 했었는지.


각설하고, 6년여 만에 우리 가족은 ‘탈 구로동’을 했다. 빠듯한 살림에도 매달 적금을 부어 쌈짓돈을 모으고, 거기에다 융자를 얹어 이사 간 곳은 가리봉동이었다. 바로 옆동네지만 이곳은 딴 세계였다. 안방은 운동장처럼 넓었고(당시의 느낌으론) 욕실과 거실도 있었다. 방이 3개여서 중학생이던 누나는 드디어 자기 방을 갖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당에 화단을 만들고 장미를 비롯한 갖가지 꽃나무들을 심으셨다. 여름엔 옥상에 돗자리를 펴고 가족들이 누워 별빛 아래 담소를 나누거나 만찬을 즐길 수도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뉴스를 보고 걱정을 했던 배경이다. 어린(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우리 형제들에겐 우리 집이 ‘호화주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을 일이지만, 주변에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 늘 미안함과 부담스러움을 마음 한 켠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뺑뺑이를 돌린 결과 내가 간 학교는 한강의 한 섬(?)에 있는 고등학교. 새로운 친구들 대부분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도 어느 아파트에 사는가, 몇 평에 사는가에 따라 빈부 격차가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 안에서의 차등이었다. 나만의 ‘호화주택’에 살던 어리버리한 아이가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그런 순진함이 용납되지 않는 시대다. 신자유주의가 사회 시스템 뿐 아니라 개개인들까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상식이 되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보수(수구)/진보를 막론하고 이를 상수로 여기고 있는 듯 싶다. 변화가 불가능해 보일만큼 자본주의는 시스템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과연 바뀔 수 있을까. 힘든 싸움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선 시스템에 대한 거창한 구호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 순진함, 예민함의 회복이 절실한 것 아닐까.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인식하고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는 그런 바보스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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